합덕(合德) 일대의 지명이 역사상에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 37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 웅천주(熊川州 공주) 소속 군, 현, 성(郡 縣, 城)의 이름중에 금물현(今勿縣)이 나온다.
같은 책 권36 신라지리지(新羅 地理志)에서는 이산현(伊山縣)의 영현(領縣)으로 금무현(今武縣)이라 했다.
본래는 백제 금물현이었고 신라 경덕왕이 개명했는데 지금의 덕풍현(德豊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백제 사람들의 큰 강이나 시내 이름의 어원(語原)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큰 물이란 의미에 귀착하게 된다. 그래서 큰 물줄기를 따라 다스리는 현(縣)을 백제식 한자음으로 큰 물현을 금물현(今勿縣)이라 했고 당시 당나라 침략군은 자기나라 음으로 기문현(己汶縣)이라고 적고 있다. 신라가 당의 군사를 몰아내고 이 땅을 점령한 후 경덕왕16년(757)에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군, 현의 명칭을 한자식으로 개명할 때 금무현으로 고쳤다.
금물현을 한자 뜻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말 물(勿)자를 호반 무(武)자로 바꿔 기록한 것인데 음은 비슷하지만 무(武)를 숭상하는 지역이란 뜻이 담긴 이름이다. 이곳이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신라가 이 고장에서 싸워 이겼던 역사를 반영하여 개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강화만 일대를 근거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남 해안으로 이어지는 금물현 일대(아산만 일대)의 해상세력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태조가 신임한 개국공신 박술희(878-945)와 궁예를 폐위시키고 왕건을 옹립한 마군장군 복지겸도 같은 또래의 청년장군으로 면천(沔川) 출신임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견훤(867-936)도 금물현 일대 아산만을 장악하지 않으면 강화만 세력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태조16년(933) 5월에 혜성(면천)을 침략하는데 합덕방죽을 쌓고 군마에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합덕방죽 옆 조쟁이에 말이 교접했다는 말씹골이 있다. 태조17년(934) 9월 20일 태조가 운주 친정을 강행하니 견훤도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적전에 나가 싸우다 대패하였다.
태조는 백제군사 3천여명의 머리를 베거나 생포하여 크게 승전하니 웅주와 운주(홍주) 이북의 30여성이 태조에게 항복해 들어왔다. 이에 태조는 금물현의 본뜻을 살리면서 고려 조정에 큰 덕(德)을 베푼 곳이란 의미를 담아 덕풍(德,豊)이란 순 한자식으로 현의 이름을 개명했다. 큰 덕(德)자와 넘칠 풍(豊)자로 지었으니 큰 물이란 의미가 모두 담긴 뜻이라 하겠다.
이 덕풍현의 관할구역이 지금의 합덕, 고덕, 봉산지역으로 그 당시에는 해안연안이었다. 지금의 우당합덕들, 고덕구만들, 상장들, 용머리들, 봉산대지리 포두(개머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그래서 큰 물현, 즉 금물현이라 했다. 전 부여 박물관장 홍사준(洪思俊)은 삼국시대 관개용지에 대한 논문에서 합덕(合德)이란 지명은 합덕지(合德地)에서 유래되었다며 합덕지를 수리개축할 때 수만 장정들의 합심적덕(合心積德)을 상징하는 합덕(合德)에서 유래되었다고 논술하고 있다.
고려 말 충선왕 폐위와 충렬왕 복위로 심각한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 성종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이 사건을 원만하게 처리하게 하여 대공을 세운 환관 황석량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권19 홍주목 고적 합덕폐현 조(合德廢縣 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덕풍현에 속해 부곡이 되었었다. 고려 충렬왕 24년에 읍인 환자 황석량이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가 있으므로 올려서 현으로 했다 뒤에 래속됐다.」
합덕현은 본래 덕풍현 소속의 부곡이었는데 이곳 출신 환관 황석량이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충렬왕24년(1298)에 합덕부곡을 합덕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조선 태종5년(1405) 5월26일에 이산현(伊山縣)과 덕풍현(德豊縣)을 병합하여 덕풍현의 큰 덕(德)자와 이산현의 뫼 산(山)자를 따서 덕산현이라 하고 관아는 덕풍현 관아가 있던 별아니 (현 고덕면 상장리) 서쪽 해상동(현 대천리)에 덕산현 관아를 두었다.
태종13년(1413) 10월15일에 전라도 완산(完山)을 전주로, 경상도 계림(鷄林)을 경주(慶州)로 고쳐 부르게 하고 목부(牧府)가 아닌 군현(郡縣)의 명칭으로 주(州)자가 든 곳은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때 면주(沔州)도 주(州)로 승격한지 120년만에 군(郡)으로 강등되어 면천(沔川)으로 개명하여 면천군이 되었다.
태종16년(1413) 1월 4일 병조판서 박신, 도진무 한규, 지신사 류사눌 등과 의논하고 순성(태안)을 강무소(사냥터)로 삼아 공식 행사를 겸해서 말썽이 된 순제(蓴提) 건설현장을 직접 가보기로 결정하고 2월 4일 한양을 떠나 5일 저녁에 직산 홍경원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자고 6일 온창(온양과 신창을 온창이라 불렀다.) 인군원(仁君院)에서 묵고 7일 덕산현 해상동 관아에서 셋째 왕자 충녕대군(후에 세종왕)과 같이 하루밤을 잤다.
이 때 태종과 충녕대군은 내포 큰 물 나루를 건너 합덕, 대전(궁리)을 지나 상궁리 장사래를 경유하여 해상동에 당도했다. 태종의 어가는 11일 순성에 도착하여 이작지산(伊作只山)에서 사냥하고 내관 황도, 사재감정 조서노등을 보내어 순제 운하를 파는 것에 대한 편리 여부를 살펴 보게 한다.
태종18년(1418) 2월13일 막내 왕자 성녕대군 종이 12세로 돌아가자 태종은 세자만 한양에 남겨둔 채 개성으로 가서 그 해 6월 3일 세자 양녕대군 제를 폐하고 셋째 왕자 충녕대군 도(1397-1450)를 세자로 책봉하고 7월 29일 왕실 일가가 모두 한양으로 돌아 온 다음 8월10일 왕세자에게 선위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세종이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