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남이흥 장군 집안은 남씨양세충신 정여문이 있는 충신 집안의 후손이다. 충신 집안에서는 왕실의 유고시 문상을 다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고종 황제가 서거하고 남이흥 장군 문중에서는 남상락, 남주원, 남상직, 남계창 일행이 고종 황제 장례에 문상을 가게된다. 고종 황제 장례를 마친 남상락 일행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독립선언서 태극기를 나눠 가지고 파고다 공원의 3.1만세 운동에 참여한다. (상기에 내용은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 P.231에 기록되어져 있다.)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운동을 마친 뒤 남상락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일본제 호로등 속에 넣어 고향 당진으로 돌아온다. 그 태극기를 본 부인 구원홍 여사는 밤을 새워가며 명주실로 태극기를 제작해 남편 남상락에게 준다. 그는 태극기를 가슴에 지니고 다니며 독립만세 운동을 했다.
또한 남상락, 남상집 등과 여러 남이흥 장군 후손 종인들은 대호지면 면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독립운동 거사를 주도한다. 독립운동 거사를 주도한 인사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천의장날을 이용한다.
천의장터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하며 일본 주재소를 부수는 등 1000여 명이 격렬한 만세운동을 했지만 끝내 많은 분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
남상락은 그 자수태극기를 갖고 만세운동을 하다 많은 분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여러날 고초를 겪었다. 출감 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51세 일기로 순국한다.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 인물들의 비문이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세워졌고 1990년 조금리에 창의사가 건립되 천의장터에서 벌어진 사실의 사건기록 문헌이 입수되면서 4.4 독립만세운동 인물들의 위패가 창의사에 봉안된다.
창의사에 위패가 봉안된 남이흥장군 후손들만 50분에 이른다. 이 중 17분이 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남이흥 장군 이후 후손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전까지 가계도를 살펴보면 무과를 급제하고 벼슬을 지낸 분들이 115분이 된다. 115분 중 남이흥 장군 큰 아들 남두극 공이 면천군수로 부임되면서 충장공 남이흥 장군 가문은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정착하게 된다.
남이흥 장군(1576~1627)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충청도 무반 가문인 의령 남씨 충장공파의 파조이다. 대대로 문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 났으나 부친인 남유 장군이 임진왜란때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아버지의 전사소식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글공부를 중단하고 무관의 길을 택한다.
인조2년(1624년) 이괄의 반란이 발생한다. 인조 임금은 반란군에 의해 대궐을 비우고 공주에 있는 공산성으로 파천하게 된다. 당시 중군 대장의 직책으로 장 만, 정충신, 남이흥이 이끄는 정부군은 4천 군사로 이괄의 1만2천 반란군을 지금의 무학재 고개에서 평정했다.
그 공으로 진무 1등공신이 되었고 종일품 품계와 연안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의춘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 평안병사로 발탁되었다. 인조 5년(1627년) 청나라 군사가 조선을 침공해 옴에 남이흥 장군은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혼신을 다해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이 불가하자 장군은 청군을 화약고 있는 곳으로 유인 화약을 점화해 많은 적들과 함께 자폭으로 순국하여 생의 최후를 맞이했다.
인조 임금은 국장으로 장례하도록 했으며 장례시 곤룡포를 벗어 장군의 관위에 덮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한다.
또한 명나라 황제는 황제궁 앞에 그 식민들에게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귀감토록 하는 특전을 하였으며 당시 조선을 침공 했던 청나라 아민 대장 또한 전황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탄했다는 청국사기의 기록들이 전란사동국전란사(내란편), 동국전란사 (외란편), 병자호란사(정묘호란사편)에 기록 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사후에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정일품 품계와 의춘부원군에 봉했다.
그리고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고 왕명에 의해 불천위 사당 충장사와 양세충신 정여문이 내려졌다. 또한 전적지 평안남도 안주에 조선 최대 충민사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