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세종은 태종16년 2월 7일 대군 때 부왕을 따라 합덕 대전(垈田)을 지나 간 것이 우연한 인연이 되었는지 세종17년(1435) 12월 28일 판한성부사 권전(?-1441)의 따님 안동권씨를 세자빈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세종19년(1437) 2월 28일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권씨는 태종18년(1418) 3월 12일 합덕현 대전(뒤에 궁리)에 탄생했다. 세종 13년(1431) 동궁에 선입되어 승휘(承徽)에 수봉 되었다가 이어 양원(良媛)에 진봉되고 세종19년에 순빈봉씨를 폐하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세종23년(1441) 7월 23일 세자빈 안동권씨(1418-1441)가 왕세손을 탄생시키고 산통으로 다음날인 7월 24일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다. 왕자와 경혜공주를 낳았다. 세자빈의 부친 판한성부사 권전이 참척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해 윤11월 18일 작고하였는데 그의 집은 합덕대전(궁리)에 있었다.

세종32년(1450) 윤1월 20일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 세종은 밀린 정무처리를 하다가 2월14일 한 밤중에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월 17일 영응대군집 동별궁에서 승하하시니 재위 32년 춘추 54세였다. 왕세자 향(1414-1452)이 2월 22일 빈전(嬪殿)문밖 장막전(帳幕殿)안에서 즉위하니 이가 문종이다.

이때 문종은 지난해 난 종기가 등, 허리, 무릎으로 번져 시무할 수 없었다. 문종 원년 6월 12일 세종을 광주 대모산 영능(英陵)에 장사지내고 7월 1일 합덕 출신 현덕빈(顯德嬪) 안동권씨를 추승해 왕후로 삼아 현덕왕후라 시호하고 능호도 소능(昭陵)이라 했다. 7월20일 왕세손 홍위(1441-1457)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문종 2년(1452) 5월 14일 경복궁 강녕전에서 문종이 승하하니 춘추 39세였다. 5월 18일 왕세자 홍위가 근정전에서 12세로 등극하니 이가 단종(端宗)이다.

세종의 둘째왕자 수양대군 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해 단종원년(1453) 10월 2일 영의정 황보인(?-1453) 우의정 김종서(1383-1453)등 단종의 친위측근 세력을 살해하고 섭정해 군국대권을 장악했다. 안평대군 용을 교동도에 안치했다가 10월 18일 살해하고 단종3년(1455) 윤6월 11일 대보(大寶)를 탈취하여 근정에서 선위(禪位)를 받는 의식을 치러 즉위하니 이가 세조(世祖)다. 윤6월 20일 단종은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났으나 고립무원으로 너무 서러웠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 성삼문이 주동이 되어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이 뜻을 같이해 세조2년(1456) 4월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회석상에서 운검(雲劒)을 쥐게 된 성승과 하위지가 세조를 죽이고 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 일파를 처단하기로 하였으나 기미를 감지한 한명회의 계략으로 운검이 취소되어 후일을 도모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이들은 차열의 극형을 받고 죽는다. 이때 합덕출신 권자신이 거사 내용을 모친 최씨를 통해 상왕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권자신은 성승, 박중림과 함께 차열형을 당해 죽고 최씨는 6월18일 차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는다. 권자신은 상왕의 외숙부이고, 최씨는 상왕의 외할머니다.

세종대왕 여섯째 왕자 금성군 유가 순흥부사 이보흠과 상왕 복위 음모를 꾀했다고 10월 21일 사사하고 노산군에게는 사약을 내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24일 영월에 도착하니 상왕은 스스로 목매어 돌아가니 17세다.

세조는 왕위 찬탈을 하기 위해 충의열사와 친형제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단종을 사사하며 현덕왕후 소능을 파헤쳐 관곽을 모래사장에 버리고 문종의 부마 정종을 능지처참한 악업을 반성은 커녕 불사를 일으켜 복을 비는 인간무도의 업보로 영일이 없이 악몽과 피부병으로 평생 고통을 받다 죽으니 짧은 재위 14년으로 끝이 난다.

세조 7년(1461) 10월20일 전라도 광주에 안치했던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문종의 부마) 정종을 모반 대역죄로 능지처참하니 경혜공주는 출가해 비구니가 된다. 이에 정희대비는 악행을 참회해 문종의 부마 정종의 독자 정미수를 성종4년(1473) 계사4월19일 돈녕부 참종에 기용하니 16세다. 경혜공주는 이해 12월 18일 39세로 돌아가니 합덕출신 현덕왕후 안동권씨의 소생은 모진 삶으로 다 돌아갔다.

세조14년(1468) 9월 7일 세조는 병이 악화되어 서둘러 선위하고 8일 수강궁에서 승하하니 52세다. 성종4년 10월 1일 합덕방죽을 고쳐 쌓았다. 성종실록에 10월 초 하루 기미 경연에 나가 강의를 마치자 영사 홍윤성이 “합덕 방죽은 전조(고려)때부터 쌓기 시작하여 우리에 일으렀는데 정본이 감독해서 쌓았습니다. 길이가 2700여자로 7읍이 수리를 입으나 그 뚝이 본래 낮고 튼튼치 못하여 이제 또 비로 인해 무너졌습니다. 청컨대 제언별감을 보내어 쌓게 하소서” 전지가 가로되 “참 좋다”고 기록되었다.

합덕현은 고려 충렬왕 때 이 고장 출신 환관 황석량이 원나라 성종의 총애를 받아 부곡을 현으로 승격하였는데 반하여 폐현은 조선 세조의 왕권 찬탈 때 자기가 저지른 악업의 액운이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영혼의 저주란 이유로 현덕왕후 출생지라 하여 폐현시킨 것은 너무나 대조적인 비운이다.

이리하여 세조3년 현으로 승격된지 160여년만에 폐현되어 합남, 합북면이 홍주목에 속했다. 고종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가 경술국치 후 1914년 군, 면 통폐합에 따라 합남 19개리, 합북면 15개리, 비방면 11개리, 신종면 2개리, 범천면 2개리 도합 49개리를 합병하고, 합덕현의 이름을 따서 합덕면이라하여 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합덕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