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완 / 탑동감리교회 담임목사

당진이야기

내 고향 당진이 세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마 중국 사람들과의 교역이 시작되

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만해도 이곳 당진은 어떤 투기꾼도 눈여겨 볼 필요없는 미

지의 땅이었다.

내 고향마을 가는 신작로는 아직도 비포장길이지만 그때는 충청도에서 가장 늦게 아스팔트

길이 생겨난 것도 관심없는 지역임을 나타내주는 증거였을 것이다. 그랬어도 당진 사람들은

늘 평안하고 감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해안시대 -당진 사람들은 필히 당진시대라고 하고 싶지만-가 돌아온다고 야단법석을 떨

고 당진에 땅투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이곳 저곳에 유명한 사람들이 탄생되기 시작했

다. 솔잎 긁어 때던 뒷산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값이 뛰고 며칠 전까지 장닭 한마리와 두렁

밤콩 한 말 돈사서 양말 한두 켤레, 자반고등어 한손 사면서도 감사했던 사람들이 몇억이네,

몇천이네 틀켜쥐고 동네 유명인사들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당진에 와서 돈자랑을 못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한진항의 준치며, 펄펄 뛰는 성구미의 생선바구니, 대호만 어장의 풍성한 굴을

까고 낙지 팔고 갯지렁이 팔아오며 남부러울 것 없던 소박한 갯마을에도 유명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로 보상비의 수천 수억이 읍내로, 도시로, 서울로 자가용의 방향을 틀었다. 때를

같이하여 당진읍내에 -잠시 후에는 면소재지까지- 진한 오색 불빛이 번쩍거리며, 듣도 보도

못한 사장입네, 이사입네, 회장님네들이 거리를 누볐다.

보리 파종하여 이태를 기다리느니 일당을 손에 거머쥐는 기쁨을 알고 나면서 서로를 이해

하기 보다는 유명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 놈들에 대해 한바탕 하고싶은 충동이 여기 저기서

생겨났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줄로만 아는 사람들이 되어갔다.” 그래서

싸우고, 취하고, 떠들고, 부딪치는 소리가 거세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건이 만들어지기 시

작했다.

역사는 사건에 의하여 기록된다. 그러나 내 고향의 이야기는 사건으로 기록되어서는 안된

다. 삶의 이야기는 흉칙한 사건을 거부해야 한다. 악한 세력과 싸워 정의가 승리할 수 있느

냐는 질문에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곳에 두 형제가 서로 싸워 그 중 하나가 죽었다면 그 사건은 당장 신문의 제

일면에 크게 보도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제가 마음을 합하고 조용히 협력하여 살았다면 아

무 신문도 이 평범한 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을 기사거리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 영혼의 힘의 조용한 활동은 우리가 추구하고 영원히 머물러야 될 생활의 현장

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진솔한 삶은 사건을 일으키는 유명인사가 아니라 무명인의 소문없

는 삶이다. 나는 내 고향 당진이 그곳으로 회귀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