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 회 / 신평 은수교회 담임목사

용서의 미학

한번은 예수님의 열두제자중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앞에 나와 정색을 하고 질문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할까요?”

구약율법에 의하면 용서의 범위는 세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사실상 같은 일, 같은 사람에게 세번의 용서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단 한번의 용서조차(폭력이나 살인까지로) 불용하는 우리네 세대에 베드로의 일곱번은 호사스런 즉흥성 말잔치로 들린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서 옷깃을 여미는 용서의 심연에 잠기게 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하여라.”

한 사람에게 사백구십번의 용서! 이것을 하기전 우리의 생은 끝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횟수의 제한에 의미가 있지않음 또한 알아야 한다. 이 거대한 용서의 바다에 그분은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한 모든 사람의 죄를 넣어버렸다. 하나님의 용서범위는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에는 일정한 요건이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가령, 최근 활발한 논의대상 품목인 전ㆍ노 전직대통령 사면문제가 그렇다. 연초에 넣었다가 연말에 풀어주는 것 가지고 오욕의 역사청산을 했다고, 또 국민화합이나 통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고 억지를 부려선 아니된다.

이런 면죄부는 오히려 그들에게 특혜를 주는 꼴이다. 이건 결코 용서가 아니라 사면권자가 대통령이라도 그 대통령을 뽑아낸 국민이 납득하고 합의와 공감이 있어야 한다.

특정지역이나 일부계층의 표를 겨냥한 정략적 정치적 수단으로 숭고한 용서의 정신을 더럽혀서는 아니된다.

용서는 정말 용서다워야 한다. 특히 용서할 자와 용서받을 자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용서받을 자들이 어줍잖게 용서를 떠들어서는 아니된다. 아름다운 용서를 아름다운 자리에 머물러 있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