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문면·석문산의 뿌리
국운이 쇠퇴하던 갑오경장 때 무너져
충남의 최북단. 리아스식 해안의 발달로 서북방향으로 교로반도가 길게뻗은 중간에 끊어질듯 잘록한 지형위에 수려한 석문산이 불끈 솟아있다.
이곳은 석문면에 연육된 곳중 해발 78m로 가장높아 석문면의 이름이 발원한 곳임에 틀림없다. 이 산의 동쪽해안에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석문(石門)이 있었다 하는데 그 규모가 웅대하여 상여가 통과하였다고 하니 장관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고을을 석문면(石門面)이라 부르는 것은 수려한 석문산(石門山)이 있기 때문이요, 석문산이라는 이름은 그 옆에 웅장한 석문(石門)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석문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차례 들은 적이 있다. 석문은 이조말엽 고종황제 당시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 7월, 장마에 뇌성벽력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이를 보고 필시 국운이 다되어서 망국의 징조가 보이는 것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열두명이 메고가는 상여가 석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셨고, 바닷물이 가득 들어오면 “질마” 같이 생긴 석문이 물위에 비추어 반은 물위에, 반은 물속에 둥그런 모양으로 나타나 장관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살펴보면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이 일어나 나라의 질서가 어지러워지자 일본군은 그해 7월27일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백성을 억압하기에 이르니 이때가 공교롭게도 석문이 무너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지금의 삼봉리, 장고항리, 교로리가 내맹면으로 있을 때 그 경치가 아름다워 풍류객들이 모여들고 지방관리가 손님을 접대하려면 이곳을 구경시켜 주었다고 한다.
1914년 일제가 통제와 수탈의 방법으로 내맹면, 외맹면, 고산면, 도동면 등을 합병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석문(石門)의 이름을 따서 석문면이라 하였다.
석문(石門)이 있던 자리는 무너진 바윗돌들이 수십개 놓여있는 지금의 선착장 입구로 그 바위 위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놀았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잔재들도 삽교천 방조제가 축조되지 않은 때에 배에실려 삽교천 깊숙한 내만으로 옮겨져 어느 제방의 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의 조자형의 집터에 사셨다 하여 아마 왜메기 바닷가에서 아취형 석문의 반영을 건너다 보셨던 것으로 판단되며 석문의 방향은 정남향이 정면이었다고 추청된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살아계시다면 115세가 되셨고, 갑오경장이 나던 해에 8세이셨으니 어린이의 눈으로 보신 것이지만 석문으로 상여가 통과하는 것. 물위에 아취형의 석문이 반영으로 비친 것. 석문이 무너져내린 것 등은 충분히 보시고 느끼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소난지도의 항일의병 당시의 상황을 듣고 보신 것을 토대로 고증하셔서 지금의 의병총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계기를 증언하셨던 분으로 기억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분이셨다.
석문(石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며 어느 위치, 얼마만한 규모에 어떠한 모양, 어느 방향으로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전설로만 남겨두기 보다는 주변환경이 옛날과 크게 변하지 않았고 석문만 사라졌으니 이를 복원하여 옛날의 경치를 되살린다면 왜목 마을의 명물로 관광자원이 될 뿐만 아니라 석문면의 뿌리를 찾는 일이요. 군민에게는 으뜸관광지의 긍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때문에 왜목마을을 관광단지로 만들고있는 즈음하여 석문을 복원한다면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살펴본 사람 : 조선형(왜목마을 관광단지 유치추진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