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 산업·경제 · 당진시대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가곡리와 동곡리의 나루터 2 “썰물 때면 바지 걷고 걸어 다녔지”
…곡리 은골과 쌍천동 송산면 동곡리에 남은 옛 지명 중 ‘은포’라 불리는 포구를 기억하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현재 송산방조제를 막은 지점에 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안평일 씨의 집은 앞마당에서 낚시대를 던지면 바다에 닿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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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건 · '우현선의 포구' · 최근 기사부터4 / 5쪽
2021.04.19 · 산업·경제 · 당진시대
…곡리 은골과 쌍천동 송산면 동곡리에 남은 옛 지명 중 ‘은포’라 불리는 포구를 기억하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현재 송산방조제를 막은 지점에 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안평일 씨의 집은 앞마당에서 낚시대를 던지면 바다에 닿을 만큼…
2021.04.19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썰물 때면 오섬포구 앞 갯고랑에도 펄이 드러났다. 오섬 앞 펄에는 특히 맛조개가 많이 났다. 오섬 주민들은 ‘써개라’는 맛 잡는 도구로 맛을 캤다. 더러는 펄에 커다란 둥지처럼 땅을 파고 들어앉아 맛을 잡기도 했단다. 그러다 물 들어오는 때를 놓치면 …
2021.04.14 · 산업·경제 · 당진시대
…다가 막히기 전 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다. 성구미포구가 대표적인 포구로 이름이 남았지만, 이전에는 가곡리와 동곡리 해안가 곳곳에 나루터가 존재했다. 옛 지명을 토대로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19년과 현재의 송산면 지도…
2021.03.29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오섬포구가 번성했던 당시 주민들 중 대다수의 남성들은 어업에 종사했다. 더러 농사를 짓는 이도 있었고, 염전에서 염부로 일하거나 어선이나 증기선이 들어올 때면 하역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선원들의 아내들은 남편들이 가져온 생선을 다라에 이고 나가 판매했…
2021.03.22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염전이 있었다. 오섬 주민들 중 여럿이 영진염전에서 염부로 일했다. 오섬포구 상류, 영진염전 뒤로 풍선이 드나들며 소금을 운반해 갔다. 염부들은 품값으로 소금을 받아 다른 곡식들로 물물교환했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설명이다. 한편 1960년대에는 당시 주…
2021.03.08 · 지역사회 · 당진시대
…나 음식점, 상점 등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도시의 신문물도 오섬포구를 통해 당진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미니스커트 입고 당진을 들어오는 관문이 오섬이었어요. 아이들이 놀다가도 배 들어온다고 하면 쭉 서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여객선에는 사람 말…
2021.03.03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오섬포구에 대해 구술자들이 말한 내용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1950년대의 이야기다. 올해 94세인 고간난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옛 기억이 또렷했다. 순성면 갈산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스무 살에 오도리로 시집와 74년째 살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2021.02.23 · 산업·경제 · 당진시대
조선시대 이전부터 당진은 해상교통이 발달했다. 포구의 기능도 주로 세곡 운반에 비중을 두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포구들은 점차 쇠퇴해 이제는 옛 지명이나 문헌을 통해 당시의 명성을 가늠할 뿐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주민들에게 당진의…
2021.01.29 · 산업·경제 · 당진시대
…해안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당진의 바닷가로 관광객들이 몰려들 무렵, 성구미포구도 외지에서 온 나들이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서해대교 놓고 고속도로가 딱 송악IC까지 밖에 개통을 안 했었거든. 그때 당시 성구미포구 포장마차가 옛날식으로 식탁도…
2021.01.21 · 환경·안전 · 당진시대
성구미포구에 자리한 당산은 예부터 당집이 있는 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다. 구술자들의 기억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당산에서 풍어제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회의를 통해 부정 없는 사람을 당주로 정했다. 당주를 맡은 사람은 섣달 그믐날 목욕재계…
2021.01.04 · 산업·경제 · 당진시대
1950년대 전까지 성구미포구에서는 중선배·유자망 어업이 이뤄졌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낭장망·자망 어업이 번성했다. ‘돼지배’라고도 불리는 낭장망은 한때 10여 척의 성구미포구 어선이 사용했던 주된 어업방식이었으나 현재는 단 두 척의 배만 남았…
2020.12.16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송악읍 도원리 출신인 송화섭 씨와 박영규 씨도 말목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말목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어린 시절, 윤장성 씨네 집 뒷마당에서 새우젓 담은 커다란 독을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 초대천 다리를 놓은 곳에 이전에도 물…
2020.12.14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송산의 아름다운 포구, 성구미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성구미 앞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건져 올리던 어민과, 유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포장마차의 정 많던 상인들은 모두 성구미를 떠났다. 그러나 고향 마을을 잃어버린 주민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름…
2020.11.28 · 산업·경제 · 당진시대
신평지역의 포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곳은 마항포구다. 말목에 새우젓 장사를 하는 집이 있어 새우젓 실은 배들이 드나들었던 마항포구는 1970년대 초대천 하류에 해바라기농장(제일농장)을 만들기 위한 제방이 쌓이면서 바닷길이 끊겨 사라졌다. 이후 …
2020.10.31 · 지역사회 · 당진시대
조용한 섬마을에 개발 소식이 날아든 건 1990년대 후반 무렵이다. 행담포구 주민들에게 서해안고속도로 개발로 서해대교가 섬을 관통하게 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았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주민들 대…
2020.10.24 · 지역사회 · 당진시대
행담도 사람들의 주요 생계수단이 맨손어업이었던 탓인지 1970년대만 해도 섬에는 개인이 소유한 배가 단 한 척도 없었단다. 채취한 해산물은 평택 만호리에서 온 배가 실어 갔다.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행담분교에 근무하는 교사를 위해 교육청에서 마련해…
2020.10.19 · 지역사회 · 당진시대
표선동 씨는 1975년 어머니, 아내와 함께 굴양식장을 운영하기 위해 행담도에 입도했다. 표 씨가 행담도에 들어갔을 때, 섬에는 모두 11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진군에서 새마을주택이라고 지어준 게 있어요. 한 동에 두 집이 살았거든. 둘씩 살아서…
2020.09.28 · 환경·안전 · 당진시대
…다. 굴이며 바지락, 낙지가 섬사람들의 주된 소득원이었다. 신평면 일대 포구에 살던 어민들도 행담도 앞에서 조업을 했고, 바지락이며 굴을 땄다. 1970년대까지 행담도에는 어선을 가진 주민들이 없었다. 당시 행담분교에 근무하는 교사를 위해 교육청에서 …
2020.09.14 · 산업·경제 · 당진시대
깔판포구에 살고 있는 이입분 씨는 첫 아이를 임신하던 해에 6.25 전쟁을 겪었다. 황해도 옹진군 가막개라는 마을에서 인천으로, 다시 연평도로 쫓겨 다니다, 21살에 당진 깔판포구에 정착했다. 첫 아이를 낳은 지 보름도 못 되어 갓난아기를 솜이불에 싸…
2020.09.05 · 산업·경제 · 당진시대
1960년대 당시 박상진·차준희 씨 부부는 깔판포구에서 잡은 꽃새우를 말려 합덕에 위치한 상회에 팔았다. 지금도 김장철 배추 파동 등 농산물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문제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단다. 더군다나 도량형이 명확지 않고 판로가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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