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권택의 99번째 영화에서 모자라고 넘치는 것 105분 동안 관객과 만나는 영화 <하류인생>에서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시간의 총량은 18년이다. 이 시간의 물리적인 양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주권을 유린한 권력찬탈자의 수괴 박정희가 절대권력을 향수하였던 기간과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의 주역들이자 광주학살의 주범들인 전두환과 노태우, 그들의 적법한 계승자로 이른바 ‘문민정부’를 수립한 김영삼이 집권한 시간의 총계와도 동일하다.
영화는 임권택(각본, 감독), 이태원(제작), 정일성(촬영), 신중현(음악)과 같은 노익장들의 생체리듬처럼 차분하고 느릿하다.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호흡은 여유 있지만, 처음부터 상실된 인과성, 사라져버린 긴장감과 속도감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 관객은 영화의 작은 ‘우스개’라도 붙잡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삶의 풍속도가 완연히 바뀐 2004년 오늘의 시점에서 스무 살 언저리 젊은 관객들이 들여다보는 지난 세기 50~60년대의 고단한 인생살이는 얼마나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 것일까, 생각한다.
임권택은 <하류인생>을 통해 개인적으로 누적된 시간의 피로와 일상의 답답함을 관객에게 토로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하류인생>은 조직폭력배와 권력기관 사이의 유사성을 설파하는 승문의 대사를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절망의 잿빛으로 물들인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통렬하게 까발린다. 그러므로 폭력과 권력의 이질동상(異質同狀)에 대한 영화작가의 시선과 통찰은 매우 선명하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내면의 떨림과 여운도 슬며시 빠져나가 버린다. 폭력적인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전투경찰과 그들의 물리력 한가운데로 다른 형태의 폭력이 교차하는 장면은 신선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폭력과 거기에 저항하는 태웅의 폭력이 두 세력의 중간지대에서 사생결단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장면은 어떤 긴장이나 반전을 얻어내지 못하고 시나브로 설득력을 상실한다. <하류인생>의 이런저런 일화들처럼 그냥 우울하게 묻히고 망각된다. 왜일까?
그것은 태웅과 혜옥의 인생 이야기가 그들의 현세적인 삶 바깥에 진행되는 이야기와 견고하게 마주보지도 못하고, 용감하게 맞서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안락한 삶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인간 태웅과 그의 충실한 내조자이며 초등학교 교사인 혜옥의 미시담론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우울하고도 구슬픈 거대담론과 끝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하류인생>은 ‘조폭의 똘마니 쭭 중간 실력자 쭭 보스 쭭 정치권력자’(정보부 요원이나 검사, 국회의원) 등으로 이어지는 권력과 폭력의 연쇄고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려진 정물화처럼 거기에 그냥 멈춰 서 있다. 그런 연쇄의 일상화된 반복과 폭력성,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군상들의 내면풍경을 절실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맑고 비판적인 영혼과 정신을 지니고 투쟁하며 살아가는 승문조차 선연한 이유 없이 어두운 폭력과 권력의 악순환 대열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더욱이 그는 종국에 지나칠 정도로 훼절함으로써 희화적인 인물로까지 전락하고 있음은 <하류인생>의 영화작가가 관객에게 대놓고 말하고자 하였던 바를 일정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절점들을 무리 없이 포착하고, 거기서 이런저런 인생의 전변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가의 솜씨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 등이 도달한 거대한 예술적 성취는 하루 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 하류인생>에서 영화작가 임권택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잠시 쉬고 있다'. 쉬어가며 찍은 영화에서도 제 빛을 온전하게 발하는 젊은 배우들은 있다.
단순 과격하지만 부드러운 조승우, 강단 있으되 너무도 순종적이어서 페미니스트들의 비난대상이 됨직한 김민선, 날카로운 눈매와 저항의 몸짓으로 호소력을 과시하는 유하준 등이 희망으로 남는다. 어디서나 희망의 등불이 반짝이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얼마나 유쾌하고 의미 있는 것이던가 ※오마이뉴스( www.ohmynews.
com ) 제공. ‘오마이뉴스’는 본사 소속 바른지역언론연대와 기사제휴 한 인터넷신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