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시사 채널에서 대기업 근로 노동귀족과 이로 인한 비정규직의 실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느끼고는 있었지만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횡포와 힘없고 가난한 자의 비애에 새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분개하여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개선을 외치며 숨진 청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이 땅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과 노동자의 권익에 획기적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패한 권력과 양식없는 사업자들에 의해 등장한 어용노조가 노조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때론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때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기도 한 양면성을 지닌 채 오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들을 위한 진정한 노동운동으로 바로 서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프랑스의 격언인 Noblesse Oblige에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단어가 뜻하는 Noblesse(명예)와 Oblige(의무), 즉 사회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는 중세 유럽 귀족들의 사회행동양식을 뿌리로 하고 있다.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이 이들 국가의 초석을 다졌고 유럽이 오늘날의 부강한 선진사회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 예로 이에 바탕을 둔 유럽 귀족사회의 전통적 모럴(morale)로 그들의 기사도 정신과 기부문화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을 많이 도용(?)해 쓰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이 있고 돈 많은 자들은 더 큰 권력과 더 큰 돈을 갖기 위해 힘없는 자들을 핍박하고, 가난한 자들의 작은 주머니마저 털어내는 더 큰 도둑놈들이 되어 간다.

힘없고 배고픈 노동자들의 값진 희생으로 일구어낸 노동운동의 대가로 탄생한 대기업 노조 중 일부 노동귀족들은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당치도 않은 불이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노동조합을 통한 이익활동에 전념할 뿐이다.

우리 옛말에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80년대 이후 여러 대기업과 부자들이, 또한 정치인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쇄락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그들이 Noblesse Oblige 정신, 즉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와 직분에 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면 그들이 왜 쇄락하였겠는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주에는 최부자집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최부자집이 부자 3대 못 간다는 속담을 깬 장본인으로 부자 12대를 이어갔다고 한다. 3대도 어려운데 어떻게 이들은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이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잘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이 최부자집은 만석지기로 1년에 1만석을  수확하였으나 1년 소작수입으로 3천석만을 받아 이중 1천석은 집안의 가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천석은 주변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에 따라 재산은 1만석을 넘기지 않았고 과거를 보되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는 등 몇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부와 명예를 12대에 걸쳐 누려왔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지도, 지배집단은 생소한 프랑스 속담이 아니더라도 이 최부자의 슬기와 지혜를 배워야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위에 있고, 노동자가 노동자를 핍박하고 차별하는 사회, 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며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리되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은 물론 작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집단에는 수많은 사회구성체가 있고 이에 따른 수없이 많은 리더들이 있으며 이 모든 구성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근간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목소리 크고 돈 많은 리더들이 판을 칠 뿐 진정 부끄럽지 않은 존경받는 리더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도층이면 지도층다워야 한다. 그 지도층다움이 Noblesse, Oblige인 것이며 진정 존경받는 리더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