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진 씨는...

1944년 당진읍 행정리에서 태어나 당진초등학교 41회, 당진중학교 10회를 졸업하고 인천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줄곧 서울생활을 하다 5년 전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고향 행정리와 가까운 정미면 봉생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원당리에 범진한자교실을 열었다. 매주 모교인 당진초 방과후학교에서 후배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으며 신성대학(교양한문)에도 출강하고 있다. 장씨에게 한자를 배우고픈 지역민은 358-5751로 문의하면 된다.

고민 많던 중학생에게는 흐린 날씨도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나 보다.

‘1960년 12월 20일, 아침부터 가슴은 이상스럽게 두근거리는데 날씨조차 고르지 못하고 이지경이니 어쩐지 울고만 싶어진다.’

50년도 더 지난 일기장의 첫 구절, 종이는 빛바래고 글씨도 희미해졌지만 어두운 밤 호롱불 아래에서 일기를 써내려가던 중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당시 고민 많고 감수성 풍부했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흘러간 세월만큼 나이도 차곡차곡 쌓여 이제 돋보기 없이는 지난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기 어려운 할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매일 밤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기를 쓰는 일이다. 장광진 씨는 1960년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작한 일기쓰기를 68세가 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결혼해 사업을 하던 청년 시절 20년간은 드문드문 빠트리기도 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쓴 세월만 추려도 30년이 넘는다. ‘굳게 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간다’하여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인데 수십년간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는 사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춘기 시절 시작한 일기쓰기

장광진 씨의 일기쓰기는 50년 전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 장씨는 공부를 곧 잘했었단다. 그 시절 만해도 공부 꽤나 하는 우등생들은 유학을 꿈꾸기 마련이었는데 장씨의 친형이 이미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터라 가정형편상 장씨는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고 싶던 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생각과 사춘기가 겹쳐 중학교 시절은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던가 보다.

“내 딴에는 공부도 잘하는데 왜 시골 중학교를 가야 하나하고 불만이 있었어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두달 반동안 집을 나와서 부산이고 대전이고 돌아다녔어요. 낙오됐다는 생각에 방황을 좀 했던 거죠.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날마다 적기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그렇게 매일 노트 한쪽씩 적어 내려간 일기가 지금은 자신의 허리까지 쌓였다. 장씨는 일기를 꾸준히 쓴 이유가 자신의 ‘한(恨)’ 때문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뭔가 줄기차게 했다는 건 맺힌 게 있고 남기고 싶은 게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일종의 한이지... 사춘기 시절에는 그랬다치고, 지금 와 돌아보면 제 인생도 굴곡 많은 인생이었어요.”

군대 제대 후 장씨는 동국제강의 전신인 일신제강에서 10년 가까이 근무를 하다 그만두고 나와서 철판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수차례 부도를 맞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장씨는 그때마다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던 건 ‘일기’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사업 실패가 자주 이어지면 술 마시고 폐인되기 십상이잖아요. 지금 돌아보면 일기 덕분에 쓰러지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요.”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 캄캄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일기를 쓰면서 쏟아내고 다시 일어설 힘도 기른 것이다.

군대에서 몰래 쓴 일기 ‘사수’한 사연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귀한 일기를 직접 보러 장광진 씨의 집을 찾았다. 서재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일기장을 모조리 꺼내어 ‘장 씨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누렇게 빛바랜 종이에는 만년필로 적어 내려간 글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일기를 뒤적이다 보니 재미있는 사연들이 쏟아졌다.

1963년 3월3일 고3시절 쓴 혈서 일기 속 문장은 사뭇 진지하고 결의에 차 있다. 피로 쓴 일기에는 참을 인(忍)자를 크게 쓴 뒤, '죄 많은 과거를 청산하고 학업에 최선을 다하련다. 피의 흐름이 헛되지 않기를' 이라고 적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꺼내 보니 장씨도 어린시절 호기가 멋쩍었는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장씨는 군 복무 중에도 일기를 썼는데 훈련병 두 달 동안은 일기쓰기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빠짐없이 쓰던 일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장씨는 두 달 간 ‘일기 사수작전’에 들어간다. 매일 저녁 점호가 끝나고 모두가 잠이 들면 몰래 일기를 써서 개인 사물함 깊숙이 숨겨두었다. 두꺼운 노트에 쓰면 들킬까봐 노트를 한 장씩 뜯어서 숨겼단다. 그렇게 쓴 일기는 휴가를 나올 적마다 조금씩 모자 안쪽에 가지고 나왔다. 한 장 한 장 몰래 쓴 일기는 한 데 다시 묶여 보관되어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썼던 일기에는 대부분 장씨의 첫사랑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 장씨에게는 사랑했던 여인 S가 있었다. 헌데 둘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는 군대로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군대에 온 남자 장씨는 매일밤 그리운 여인을 생각하며 몰래 일기를 썼던 것이다. 기억 속에 묻혀 버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장씨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십권이 넘는 일기장을 이사할 적마다 들고 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언젠가는 고향집에 보관했던 일기장을 서울집으로 옮겼다가 빈대가 함께 옮아와 며칠을 고생한 적도 있었단다.

성경책 필사, 한자교재도 직접 제작

일기쓰기는 기본이고 무엇이든 ‘쓰는 일’을 좋아했던 장 씨의 관심사는 ‘한자’로 이어졌다. 노후를 보낼 일을 찾던 중 우연히 한자급수시험을 알게 되면서 장씨의 ‘한자’ 공부가 시작됐다. 그리하여 2004년 전부터는 당진초등학교 방과후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3년간 서울에서 고향 당진으로 한문 수업을 하러 오가다가 지난 2007년에는 아내와 함께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중학교 교사를 하며 고향에 내려 와 살고 싶었던 장씨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장씨는 신성대학으로 한문 교양수업 강의를 나가고 있다. 그동안 당진초, 계성초 등에서 방과후학교 한문수업을 진행했고 당진초등학교에는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나간다. 장 씨의 글씨쓰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문수업 강의교재다. 장 씨는 자신의 교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또 하나 놀랄만한 글씨쓰기는 성경 필사본이다. 장씨는 지난 1996년부터 매일 성경을 그대로 노트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구약, 신약 모두 1753쪽에 달하는 성경을 그대로 노트에 옮겼다. 지금은 컴퓨터 한글문서로 성경을 다시 쓰고 있다고.

아마도 오늘 장씨의 일기장에는 '당진시대'에 자신의 일기장 사연이 실렸다는 이야기가 적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