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6개반, 150가구 거주
면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순성면 양유리는 150가구가 거주하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370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데 이중 200명이 여자이며, 126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다. 양유리는 원래 면천군 죽림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림면 양제리, 대촌리, 산유동과 내동, 척찬리 각 일부를 병합하고 양제리와 산유동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양유리라 하여 당진군 순성면에 편입됐다.
양유리는 6개반으로 이뤄져 있는데 여느 마을처럼 지형에 따라 붙은 옛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1반은 척찬이라 불리는데 옛 면천군 죽림면 척찬리 지역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 지금의 양유리에 포함되면서 윗자천, 상척찬이라 불리고 있다. 반면 양유리 옆마을 백석리에 포함된 척찬리 마을은 아랫자천이라고 부른다. 2반은 가재골이라 하는데 옛날에 가재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3반은 밭가운데라 하여 전중이라 불린다. 사래골의 북쪽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이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의 사당 ‘무공사’가 3반에 자리하고 있다. 4반은 사래골이라 하는데 사래는 ‘시내’를 뜻하며 양유리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5반은 양제라고 하였는데 사래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5반에 백정이 많이 살아서 짐승의 피가 늘 흘렀다 하여 피천말이라고 불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6반은 대촌, 큰말이라 불리었으며 양유리에서 가장 큰 부락이다. 조선시대 시흥도 역승에 딸린 순성구화역이 있었다 한다. 역말이라고도 불리며 순성역터가 있었다 한다.(일부 당진군지 참고)
생활권은 면천과 더 가까워
양유리는 순성면에 속해 있지만 주민들의 생활권은 면천면과 더 가까웠다. 면천면이 면천군의 소재지였던 시절이 있었을 만큼 순성면소재지보다는 더욱 번창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예부터 면천면을 더 자주 왕래했다. 특히 학군은 예나 지금이나 면천으로 포함돼 학생들은 아직도 면천초등학교와 면천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옛날부터 면천으로 걸어서 학교를 다녔지. 그때는 면천국민학교였지. 그 전에는 면천보통공립학교였고. 양유리 강습소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나막신 신고, 짚신 신고 걸어서 면천까지 학교에 다녔어.”
양유리에는 해방 직전까지 강습소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양유리 어르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강습소는 남녀공학으로 2~3개반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해방 전까지 강습소에 다녔지. 내가 3학년 때 강습소가 폐지됐어. 그 뒤로는 시험을 봐서 면천초에 들어갔지. 시험에 떨어져서 못 가는 애들도 몇 있었던 거 같아.”(성좌영)
“지금 강습소 터는 논으로 변해 흔적조차 없지. 그때는 정식교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 근방에서 좀 똑똑하다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쳤어.”(이관범)
“일본말을 배웠지. 해방 전이니까 한글을 가르칠 수가 있었간? 양유리 강습소로 원동리, 나산리 사는 아이들도 와서 공부를 했어.”(성좌영)
6.25 전쟁 당시 양유리에는 크고 작은 격전은 없었지만 피난민들은 더러 내려오기도 했단다. 또 중학생들까지 마을 어귀에서 보초를 섰다고.
“참나무숯을 굽던 가마가 있었는데 가마에서 대창을 깎아서 보초를 섰었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였지. 또 면천읍성 안에서 야구방망이랑 목총을 들고 배 깔고 엎드려 보초도 섰었지.”(이관범)
버드나무 울창한 남원천의 추억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유(陽柳)리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남원천이 정비되기 전까지 천변을 따라 버드나무가 많아 늘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많았지. 굉장히 컸었어. 버드나무 많고 따뜻한 마을이라 해서 양유리라 하는 거 아니여. 어릴 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남원천에서 놀았지. 고기도 잡고 멱도 감으면서.”(양성호)
“그때 목욕탕 갈 일이 있나. 다 하천에서 멱 감고 놀았지. 지금은 그런 풍경 구경도 못하고 살지만. 하천에 흐르는 물의 양은 지금과 다를 것 없는데 고기는 참 많았어. 자라도 많았고.”(이응호)
양유리 마을 사람들에게 하천은 놀이터이기도 했지만 농사를 가능하게 했던 젓줄이기도 했다.
“보를 막아서 인근 논에 물을 댔지. 그때는 원동저수지가 없었으니까. 남원천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논은 그나마 나았지만 나머지 산 아래, 가재골 같은 곳은 죄다 천수답이었지. 그러니 논에 물 품느라 바빴지. 그때는 전기모터가 있나 죄다 발동기로 했었어. 벼 몇 포기 심으려고 동네 사람들끼리 물꼬 싸움도 더러 했었고.”(성좌영)
“내가 어릴 적에는 메밀밭이 숱했지. 비가 안 오고 가물면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으니 벼 대신 메밀이나 콩을 심었었다고. 메밀로 수제비도 해먹고 그랬지.”(이관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