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합덕성당(당시 버그내성당)은 교세 확장으로 1960년 11월 합덕성당에서 분할됐다. 당시 신합덕성당의 공소는 11개 공소로, 합덕읍 일부와 우강면, 신평면, 순성면 일부, 면천면 일부의 5개 면을 관할했다. 이후 교세가 확장하면서 1968년에는 16개 공소를 관할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신평면에 위치한 공소가 증가해 1975년 신평성당이 신설되면서 관할 공소가 감소했다. 이후 지난해 순성성당의 신설로 신합덕성당의 관할 공소로는 △원치공소 △신촌공소 △신송공소 △세류공소 총 4개만 남아있다.

신자들의 땀방울로 세운 성전
원치공소는 1935년 합덕성당에서 공소로 인가를 받고, 교세가 점차 확장돼 순성면, 신평면, 우강면 일대 주민 1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신합덕성당 50주년 기념사에 따르면 원치공소 교우들이 비밀리에 모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됐고 고백소에 왜경을 입회시켜야 고백성사를 볼 수 있다며 억지로 신자들을 내쫓고, 저항하는 회장을 고문하기도 했다.
원치공소는 신합덕성당이 분리돼 나오면서, 신합덕성당으로 편입이 됐다. 이후 1961년 공소강당을 짓기 위해 신자들이 손수 흙벽돌을 쌓아 올렸다. 이 공소강당에서는 한글을 모르는 교우들에게 한글공부와 천주교회의 교리교육을 가르치기도 했다.
공소예절 할 수 있는 공간 없어, 사가와 분가한 공소를 가기도
신촌공소는 1950년 합덕성당 관할 공소였다. 당시 공소예절은 이기석 형제의 사가(私家)에서 이뤄졌으며 1953년엔 이병석 형제의 사가에서, 1956년에는 다시 이기석 형제의 사가에서 공동체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또한 신송공소는 이명재 바오로 공소회장의 집에 손수 지은 초가목초 건물에서 30명의 신자로 시작됐다. 이 공소회장이 선종한 후에는 공소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55년에는 세류공소가 신송공소에서 분리됐고, 신송공소는 예절을 드릴 장소가 없어 새로 분가한 세류공소로 공소예절을 하러 다니는 시련도 겪었다.
한편 세류공소는 1952년 합덕성당 소속의 세류리, 원치리, 순성면 중방리, 신평면 신송리 일부를 거점으로 공소설립이 승인됐다. 당시 공소예절은 공래봉 아릭스 초대회장의 대청마루에서 40여 명의 신자들로 시작됐다.
뿌리를 형성하는 곳
현재 공소에서는 정기적으로 매년 2회 판공성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매월 2회 공소예절을 진행하고, 나머지 2회는 신합덕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신합덕성당 김문수 야고보 주임신부는 “공소는 본당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어 과거에 건물을 중심으로 역사가 세워졌다”며 “특히 공소는 주민들의 추억”이자, 보이지 않는 뿌리를 형성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