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에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를 써서 우리 현대문학사를 크게 빛나게 한 작가 심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심훈문학상 2003년도 수상 후보 선정 심사위원회가 지난 9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바 있다.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작가 남정현, 평론가 윤병로 등은 지금까지 수상된 심훈문학상의 전통적 권위를 확인하고 올해 응모작 12편에 대한 구체적 심사에 착수했다.
9월18일 열린 2차 심사위원회에서는 예심을 통해 뽑아진 4편의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심의를 벌이게 되었다. 예선을 통해 후보작으로 거론된 작품은 「저수지」(표윤명)을 비롯 「슬픔의 저편」(이령), 「결혼 제출용 자기 소개서」(이완형), 「달빛 사다리」(최영두) 등이었다.
이들 소설들은 각기 특색있는 문학성과 기법을 갖춘 역작들로서 쉽사리 우열을 가리기 힘든 가작으로 평가되었다.
소설 「저수지」는 노부부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여름, 가을, 겨울, 봄 등 4계를 통해 옛 추억을 향수어린 문장으로 되살리고 있어 잔잔한 감흥을 안겨준다. 발연리 저수지(일명 원탱이 방죽)가 배경이 된 이 소설은 욕쟁이 할아버지와 꼬부랑 할머니의 기이한 삶, 특히 욕쟁이 할아버지가 때를 가리지 않고 저수지 한쪽 편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 그의 괴벽한 언행과 희생적 선행을 치밀하게 조명해서 저수지를 에워싼 전설적 얘기를 흥미있게 엮어냈다.
「슬픔의 저편」은 한 여성이 휴가차 파리행 여객기 속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한 남자와 대화하면서 여러모로 잡다한 얘기가 서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파리 체류 중에 겪었던 갖가지 견문이 소상하게 피력되면서 세심한 감회가 실타래가 풀리듯 길게 피력된다. 이들 두 남녀의 만남은 파리에서 비오는 날 뜻밖에 이어지게 되어 그들의 고독한 슬픔이 별을 바라보면서 낭만적으로 해소되고 있었음을 소설의 종말에서 시사해 주고 있어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한편 「결혼 제출용 자기 소개서」는 오늘의 우리 세태를 고스란히 드러내 부정으로 병들고 있는 사회의 병리를 깊숙이 파헤치고 있다. 오랫동안 대학강사로 전임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인배와 그와 같은 강사인 정아영과의 애정갈등을 생동하게 보여준다.
전임 공채에서 번번히 자기 소개서를 써서 쓴 잔을 마신 여인배가 결혼의 승낙을 위해 다시 ‘자기소개서’를 강요당하는 충격을 맛보게 된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자랐지만 어려서 겪게 된 지울 수 없는 흔적은 남은 삶을 살아가는데 결정적인 짐을 지우게 되기 때문이다.”란 작가의 말이 이 소설의 핵심적 메시지가 될 것이다.
끝으로 「달빛 사다리」는 표제처럼 퍽 서정적 분위기를 풍기는 농촌 마을에 배경을 둔 작품이다. 나이 사십에 장가도 안 간 ‘소’의 신변사가 소상하게 소개되어 주목되었다.
“소는 느티나무 마을을 떠올린다. 느티나무 언덕을 지키고 있는 작은 공부방이다. 아이들에게 독서지도와 글쓰기 그리고 컴퓨터 수업을 해주고 있었다.”
이렇듯 소는 ‘작은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소의 어머니 집에 살았던 ‘새댁’의 비운을 슬프게 떠올리기도 한다.
“소는 무엇이 지금 시대를 이렇게 박되고 여유없게 만들까 생각했다”는 대목에서 지난 세월의 인간적 향수를 진하게 환기시킨다. 더욱이 이 소설에서 “반짝이는 달빛의 길이었다”고 아름답게 서술되어 잔잔한 감흥을 남게 한다.
이상과 같이 예선에서 뽑힌 4편의 소설들이 각기 특이한 얘기를 담은 것으로 엇비슷한 문학적 중량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선자들에게 각별히 주목된 「저수지」와 「슬픔의 저편」이 최후의 후보작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최종심에서 두 작품에 대한 선자들의 진지한 논의 끝에 표윤명의 「저수지」를 올해 심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데 합의하게 되었다.
끝까지 경합했던 수상후보작 이령의 「슬픔의 저편」은 작가의 문장적 서술에서 치밀한 심리적 묘사와 섬세한 표현기법이 뛰어났지만 작품에 담겨진 주제성이 투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지적되었다.
수상작이 된 「저수지」는 전작에 비해서 소설전개가 순탄하게 4계에 따라 서술되었지만 아주 부담없이 읽히는 문장력이 돋보였다고 할 것이다. 특히 회고조로 추억하는 소년시절 이상한 눈으로 지켜보았던 ‘욕쟁이 할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온정의 시각이 한 폭의 아름다운 회화처럼 단아하게 재현되었다는 점을 높이 사게 되었다.
오늘처럼 문학적 기법과 주제가 불투명한 소설계에 건실한 소설의 한 전범을 「저수지」에서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수상작가 표윤명은 지난 해 수상후보로 거론되었던 점을 상기하면서 더욱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약력
■남정현(소설가)
·1933년 충남 당진출생
·1958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1961년 제6회 동인문학상 수상
·2002년 민족예술상 수상
·창작집 : 분지, 너는 뭐냐?
허허선생 외 다수
·남정현 문학전집
■윤병로(문학평론가)
·1936년 평남 중화 출생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958년 성균관대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1974년∼2001년 성균관대 교수 및
문과대 학장 역임
·2001년 성균관대 명예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월탄문학상(1974), 서울시문화상(199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8) 등 수상
·평론집 현대작가론, 한국 현대 비평문학 서설, 한국 현대 소설의 탐구, 박종화의 삶과 문학, 한국 근·현대문학사
·윤병로 평론 선집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