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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 · 타임라인

푸르던 날의 군대

주민 66명의 앨범에서 고른 87장 · 1961 — 2001년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군대와 청춘’ 장면만 모아 세월 순서로 엮었습니다. 장마다 그 사진을 꺼내 준 주민의 말을 그대로 옮겼고, 아래 링크로 그 사람의 앨범 전체를 펼쳐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48명 — 이름을 누르면 그 사람의 첫 장면으로
  1. 1961년

    박시양송악읍선거위원장

    아내와 함께 산 60년

    아내와 함께 산 60년

    세 번째 사진은 군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1961년 1월 17일에 경기도 일동에 있는 5군단포병사령부에서 군생활을 했다. 부대이동으로 제대는 홍천에서 1963년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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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965년

    강병수당진사무기 신도리코 당진점 대표

    물난리 때문에 없어진 사진들

    물난리 때문에 없어진 사진들

    첫 번째 사진은 강재구 공원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육군이었던 강재구 소령은 나의 당숙이다. 당숙은 1965년 10월 4일 파월을 앞두고 수류탄투척 훈련을 실시하던 중 이등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떨어뜨리자,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폭발하려는 수류탄 위를 덮쳤다. 그리곤 중대원 100여 명의 생명을 구하고 사망했다. 이에 당숙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해 당숙이 소속돼 있던 맹호부대 제1연대 3대대를 그의 이름을 따 ‘재구대대’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당숙이 산화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는 강재구공원이 있어, 종종 가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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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966년

    “슬프고도 그리운 그때”

    “슬프고도 그리운 그때”

    1966년 25살 즈음 참가했던 월남참전 당시 모습이다. 나는 1년 반 동안 참전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슬프고도 그립다. 특히 십자성 부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과 소식이 끊긴 것 가장 안타깝다.

    전우였던 ‘김용서’는 홍성군 은하면 출신이었고, ‘정인화’는 고향이 강원도 묵호항이었다. 또 ‘황유태’는 예산저수지가 집이었는데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이사했다고 들었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충남지회를 통해 샅샅이 찾아봤지만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만약 만나게 된다면 반갑기도 하겠지만 세월로 하얗게 새버린 흰 머리를 보면 슬프지 않을까. 그래도 꼭 생전에 전우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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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967년

    “장례선양단 활동 이어와”

    “장례선양단 활동 이어와”

    1967년 참전할 당시 사령관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던 모습이다. 나는 10년 전 당진에 와서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사무실에서 잠시 일을 했다. 그후 무공수훈자회를 알게 되면서 현재 장례선양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장례선양단은 국가유공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대통령 근조기를 전하고 태극기 관포와 단체조문을 한다. 일주일에 많으면 5군데의 장례를 가기도 한다. 갈 때마다 항상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편히 가시라’는 말로 묵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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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68년

    구관회송악읍 석포리 전 이장

    “한미 FTA 통과로 농촌 미래 걱정”

    “한미 FTA 통과로 농촌 미래 걱정”

    첫 번째 사진은 1968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백마부대 포병사령부 소속으로 파병돼 통신병 보직을 맡았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나이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소대원들이다. 제일 좌측에 있던 김정현 병사는 손재주가 많았는데 수류탄을 분해한다고 나섰다가 사고를 당해 본국으로 후송됐다. 제일 우측의 이길수 병장은 계급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솔선수범해 일을 도맡아 했다. 지금도 꼭 만나보고 싶은데 찾을 길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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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1968년

    근검절약 몸에 밴 지난 세월

    근검절약 몸에 밴 지난 세월

    첫 번째 사진은 1968년도 군복무 당시의 사진이다.

    36개월 복무 하며 5사단에서 꼼꼼하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허중성 중대장이 담당하는 부대에 배치됐다. 그의 꼼꼼하고 엄격한 성격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군생활 3년처럼 사회에서도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조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 지치고 힘들때면 그의 말을 떠올리면 항상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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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969년

    부산공항에 마중나온 가족들

    부산공항에 마중나온 가족들

    나는 1969년부터 1년 반 동안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이 사진은 그때 함께했던 전우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지원해서 월남전에 참여했다. 그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젊었고, 하고 싶었기에 지원했다. 동네에서 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내가 그냥 베트남에 가버렸으니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났다가 복무를 마치고 부산 공항으로 귀국하던 날, 그때 온 가족이 마중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던 젊은 시절」 앨범 펼치기 →

  8. 1969년

    장용희대호지 적서리

    “명절 땐 열흘 밤낮 머리 깍아”

    “명절 땐 열흘 밤낮 머리 깍아”

    세 번째 사진은 베트남전쟁에 파병 나갔을 때 당시 소대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맨 앞 줄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십자성부대에 배정받아 1969년 8월부터 1970년 7월까지 1년 동안 베트남에서 생활했다. 전쟁은 베트남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국민들의 삶은 어려웠다. 우리도 휴전 상태인 만큼 안보를 튼튼하게 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명절 땐 열흘 밤낮 머리 깍아”」 앨범 펼치기 →

  9. 1970년

    안명수우강면 송산1리 노인회 총무

    살벌했던 월남 전쟁의 기억

    살벌했던 월남 전쟁의 기억

    첫 번째 사진은 1970년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군수물자 지원부대에 소속돼 있었다. 22세 때 자원해서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 사진은 휴식시간에 중대장과 동료들과 함께 야자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우리 부대는, 도깨비 부대라고 불리던 백마 28연대에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 부대에는 노천극장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한국가수들이 위문공연을 하곤 했는데, 노천극장 밖 병원에는 전쟁에서 부상 입은 군인들이 이송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의 다른 모습이었다. 참 살벌했다.

    「살벌했던 월남 전쟁의 기억」 앨범 펼치기 →

  10. 1970년

    편종만당진외국인교회 담임목사

    월남 파병을 마치고

    월남 파병을 마치고

    이 사진은 월남 파병을 마치고 제대한 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이가 25세였다. 나는 1970년 7월 가족을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환송받으며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일주일이 지나서야 다낭을 거쳐 나트랑에 도착했고, 또 3일 후에 C130 수송기를 타고나서야 사이공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날 사령부에서 위문공연이 있어 자리를 비운 사이 헌병대가 공격을 받아 건물 일부가 파손돼 긴장속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베트남을 떠나기 전날 밤,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며 죄스러움과 미안한 마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내와 함께한 꿈만 같았던 43년」 앨범 펼치기 →

  11. 1972년

    홍천표전 당진군농업기술센터 소장

    “월남전 파병의 기억”

    “월남전 파병의 기억”

    첫 번째 사진은 1972년 월남(베트남)전 파병부대인 백마부대원으로 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백마부대 28연대 소속인 나는 8개월간 월남에서 복무했다. 나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준 것도 베트남이었다. 총상을 입고 반년 가량의 치료 끝에 3년의 복무기간 중 1개월여를 남기고 의가사제대를 했다. 주변인들은 잘 모르지만 당시 총상 뿐만 아니라 폭탄의 파편도 온몸에 남는 등 내 몸은 만신창이었다. 당시의 일로 인해 나는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었다. 사진 속의 두 아이들은 부대가 주둔했던 인근의 원주민 아이들이다.

    「“월남전 파병의 기억”」 앨범 펼치기 →

  12. 1973년

    최규범대호지면 개발위원장

    "미호고등국민학교 시절 법주사에서…"

    "미호고등국민학교 시절 법주사에서…"

    첫 번째 사진은 1973년 군 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훈련 도중에 찍은 건데 내가 1년만 더 일찍 군에 입대했다면 베트남 파병장병들 속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경기도 포천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저 당시 북한의 김신조 무장공비단이 내려와 내 군생활도 8개월이나 길어졌다.

    「"미호고등국민학교 시절 법주사에서…"」 앨범 펼치기 →

  13. 1975년

    박인규전 우강면개발위원장

    부대 앞에서 선을 보다

    부대 앞에서 선을 보다

    1975년도 21살에 입대해 제대를 앞두고 찍은 사진이다. 서해안지역에서 주로 근무했다. 나는 군대에 있었는데, 동생과 인연이 있던 아내를 아버지가 무척 예쁘게 봤었나보다. 나를 만나게 하려고 일부러 동생, 동생친구와 함께 내 면회를 보냈던 것이다. 이후 양가식구가 내가 있던 부대로 선을 보러올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비상사태가 상황이라서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결국 근처 다방도 가지 못한 채, 어느 집 추녀 밑에서 겨우 만나 선을 봤다.

    <세 번째 추억사진>

    「어느 집 추녀 밑에서 선 본 사연」 앨범 펼치기 →

  14. 1980년

    김칠성순성면 성북2리 이장

    나팔바지에 장발…”멋 좀 부렸지”

    나팔바지에 장발…”멋 좀 부렸지”

    다섯 번째 사진은 1980년대, 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우리 집 주변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때는 장발이 인기였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장발 단속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시골에 살았던 나는 장발 단속에 대해 전혀 몰랐다.

    어느 날 고향인 당진을 찾은 친구와 읍내에 놀러 가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머리에 고속도로가 생겼다. 멋 부리기 좋아했던 나는 굴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계속 기르기도 했다. 심지어 이 시절엔 옷도 맞춰 입었다. 당시 교복센타라는 곳에서 의복을 저렴하게 맞춰 입을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직접 셔츠를 디자인해 입기도 했다. 와이셔츠 주머니가 가슴 쪽에 있어 볼펜이 계속 빠지는 것이 싫었던 나는, 볼펜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머니를 옆구리 쪽에 만들기도 했다.

    >> 김칠성 순성면 성북2리 이장은

    ·1955년 순성면 성북2리 출생

    ·유동초·설성중·설성고 졸업

    「나팔바지에 장발…”멋 좀 부렸지”」 앨범 펼치기 →

  15. 1982년

    박권병당진군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장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 보내야겠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 보내야겠다”

    첫 번째 사진은 1982년 제1공수여단 근무하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오대산으로 유격훈련을 가서 찍은 사진으로 기억한다. 같은 내무반의 동료들인데 저 당시 내무반에서 잤던 동료들은 나(맨 오른쪽)를 비롯해 몇 명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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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984년

    “카투사 시절의 추억”

    “카투사 시절의 추억”

    첫 번째 사진은 1984년 군 생활 시절 미군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군대에 먼저 가야했다. 지금이야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저 당시에는 영어도 술술 나오고 그랬다.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미군부대에서 생활했던 카투사(KATUSA: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육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였던 나는 EO(Equel Opportunity)사병이었다. EO사병은 카투사 중에서도 한국인과 미국인의 중간에서 문화적 차이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나는 특히 부대 내에 있던 한국여성들(윤락여성 등)과 미군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러 다녔었다. 보람도 있었지만 눈뜨고 보지 못할 일을 여러 번 겪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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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985년

    김용대새마을지도자 합덕읍협의회장

    지현아, 동진아! 보고싶다!

    지현아, 동진아! 보고싶다!

    세 번째 사진은 1985년에 공군 동기들과 찍은 사진이다. 맨 왼쪽부터 나, 안동 출신의 조지현, 담양 출신의 김동진이다. 우리는 1983년 3월 1일에 함께 입대했다. 35개월 간 군 복무하는 동안 나는 서울 항공대에서 복무하다가 마지막 한 달은 동기들과 함께 본부에서 근무했다. 전역 후에도 연락하며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연락이 끊겼다. 매우 보고 싶은 동기들이다. 다시 만나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또한 군대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당시 나는 흔히 ‘영감’, ‘별’이라고 불리는 계급이 높은 장군의 운전병이었다. 당시 모시던 상사가 담배를 안 펴서, 흡연자였던 내게 금연하라고 혼을 냈다. 그 계기로 담배를 끊게 됐고 지금까지 금연하고 있다. 당시엔 상사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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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988년

    강홍준자연보호 당진군협의회장

    “자연보호가 내 삶의 큰 기둥이었다”

    “자연보호가 내 삶의 큰 기둥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1988년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사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그대로 있어 소개를 하고 싶다. 맨 왼쪽에서 맥주 마시는 젊은이가 나. 그 옆의 친구들은 분명 내 친구들이 맞는 것 같은데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눈이 어두워져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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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1989년

    류기환전 합덕청년연합회장/합덕프라자 대표

    [류기환 전 합덕청년연합회장/합덕프라자 대표] 7자매의 첫째였던 아내

    [류기환 전 합덕청년연합회장/합덕프라자 대표] 7자매의 첫째였던 아내

    첫 번째 사진은 1989년 내 군생활 시절 모습이다. 강원도 양구 2사단에서 군생활을 했었는데 각종 보직을 두루 거치다 말년에는 행정병으로 근무했었다. 누가 사진을 찍었는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보니 색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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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1990년

    성대용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당진군지회장

    “유공자 유족에 대한 지원 전무해”

    “유공자 유족에 대한 지원 전무해”

    첫 번째 사진은 1990년 6월6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가 당진에 처음 설립할 때 모습이다. 당시의 명칭은 ‘사단법인 대한무공수훈자회 당진군지회’였는데 1991년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증개정 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특수법인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로 바뀌며 보훈청의 공식 단체로 등록됐다. 처음 시작은 25인의 회원으로 구성됐으며 당시에는 보조금이 없어 1인당 5000원의 회비로 운영했다. 가운데 유일한 여성회원인 박인예 씨는 육군 소령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바 있다.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에 키 큰 사람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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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1991년

    송민수석문청년연합회 전 회장

    “지렁이 잡아 용돈 벌던 시절”

    “지렁이 잡아 용돈 벌던 시절”

    두 번째 사진은 1991년 충주에서 경찰학교를 다니던 시절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지금도 꽃게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부모님이 각종 해산물을 한가득 싸들고 면회를 오셨다. 그때는 그물 구멍이 커도 꽃게가 한가득 잡힐 만큼 꽃게가 많았는데 지금은 촘촘한 그물망을 써도 잘 잡히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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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1991년

    김향곤송산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회장

    “전국 집회에 투입돼”

    “전국 집회에 투입돼”

    1991년 의무경찰로 복무했을 때다. 일찍 입대하고 싶어 의경에 지원했다. 나는 대전 삼례면에 위치한 제1기동대 제1중대에 속했었다. 이곳에서 복무하는 35개월 동안 여러 집회에 투입됐다. 학생운동이 있을 땐 대학교로, 5월에는 광주로, 또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 등을 다녔다. 당시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운동이 거셌다. 그때도 동원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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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1994년

    원종돈용인대학교 당진시동문회장

    스무살, 체대에 입학하다

    스무살, 체대에 입학하다

    이 사진은 1994년 대학교 4학년 때 수상구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용인대 체대는 선후배 간의 군기가 굉장히 심했다. 1학년 첫 수업을 할 때 선배들이 들어와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군기를 잡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든 학생들이 함께 듣는 수업시간엔 특히나 더했다. 한 번은 물구나무를 시키더니 그 상태로 손을 빼고 바닥에 머리를 박으라고 시켰다. 거기에 더해 양 손 뒷짐까지 주문했다. 사람이 급한 상황에 닥치니 안 될 일이 되는 것을 보고 그 자세에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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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1999년

    이승호원 커뮤니케이션 대표

    “아내를 위한 황토집을 짓다”

    “아내를 위한 황토집을 짓다”

    첫 번째 사진은 1999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중대장을 지내며 제대를 1년 앞두고 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장군의 꿈을 이루기 위해 ROTC를 지원해 1993년부터 1999년까지 7년 동안 장기근무를 했다. 꿈을 위해 군대에 남아있을까도 생각했지만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제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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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01년

    성대용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당진군지회장

    “유공자 유족에 대한 지원 전무해”

    “유공자 유족에 대한 지원 전무해”

    세 번째 사진은 3~5대 당진지회장을 역임한 석창성 씨가 국립묘지가 안장될 때 찍은 사진이다. 2001년 9월21일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좌측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이고 가운데 있는 사람이 김응직 회원이다. 성구미포구 근처가 고향인데 지금은 서울에서 아들과 생활하고 있다. 바로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상이군경회장 이었던 차규영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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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군 제대하면서

    남기호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 유족회장 전 당진군의원

    “결혼사진 대신인 소중한 사진”

    “결혼사진 대신인 소중한 사진”

    첫 번째 사진은

    대호지면 장정리 청년회원들의 단체 사진이다. 어느새 50여년이나 흘렀다. 대호지면 장정리 청년회장을 맡았던 나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당시 대호지면에서 처음으로 장정리 마을회관을 직접 건축했다. 이후 대호지면에 마을회관들이 계속 생겨났다. 저 사진은 군 제대하면서 찍은 건데 장정리 마을에서 12명의 청년들이 동시에 입대를 했었다. 대호지면에서만 90여명이 입대를 한 기억이 있다.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군에 입대하니 일을 할 인물들이 없어서 말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저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뜨고 없다는 것이다. 뒷줄 오른쪽 끝에 있는 친구가 최희창이고 이병구도 보인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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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1년 이야기

    한창준전 당진군의원

    “모든 운동 중 씨름이 가장 재밌었다”

    “모든 운동 중 씨름이 가장 재밌었다”

    첫 번째 사진은 내 군생활 모습이다.(맨 왼쪽이 나) 남들과 좀 다른 군생활을 했던 나는 헌병대에서 사복근무조였다. 헌병대에서 주로 DP조(또는 군무이탈자 체포조)와 헌병수사관과 관련된 직무에 근무하는 헌병이 사복을 입는다. 신분이 노출되면 안되는 직책인 탓에 다른 이들과 달리 편안히 군생활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위험한 간첩체포작전 등에 나서 성과도 많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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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2011년 이야기

    구관회송악읍 석포리 전 이장

    “한미 FTA 통과로 농촌 미래 걱정”

    “한미 FTA 통과로 농촌 미래 걱정”

    두 번째 사진도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이다. 옆에 있는 여자가 가수 백설희 씨인데 위문공연을 왔다가 함께 사진을 찍게 됐다. 당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봄날은 간다>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당시 실내 업무가 많아 피부가 흰 편이었던 내가 위문공연단의 시중을 드는 일을 도맡아  사진을 찍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박재란, 이미자 등 톱스타들이 위문공연을 많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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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군복무 중

    김동헌당진군체육회 부회장

    “아버지 이어 이장 활동 뿌듯”

    “아버지 이어 이장 활동 뿌듯”

    세번째 사진은 보안부대에서 군복무 중에 찍은 사진이다. 내가 근무하던 보안부대는 다른 군부대보다 엄격한 곳이었다. 가족들의 내력에서부터 신상이 명확해야만 복무가 가능했다. 당시만해도 군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고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던 때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군 생활을 보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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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2011년 이야기

    이성태제13기 민주평통당진군협의회 회장

    “인생을 증명하는 삶의 흔적”

    “인생을 증명하는 삶의 흔적”

    세 번째 사진은 7~90년대 공군 주력기인 팬텀전투기와 함께 이륙 전 점검 중에 촬영한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인 청·장년기에 빨간마후라 전투기조종사로서 공군주요 지휘관 및 참모 등으로 활동하고 전역 후 항공정보학 교수직을 명예롭게 즐기며 멋진 청·장년기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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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군 생활이 끝나갈 무렵

    이금돈한국민속예술협회 당진지회장

    “농악에 내 인생을 걸었다”

    “농악에 내 인생을 걸었다”

    세 번째 사진은 군 생활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혹한기 훈련 때 찍은 사진이다. 인천에서 복무했는데 주간 소대 공격을 마치고 후임들과 찍은 사진이다. 제일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나다. 당시 훈련 때 날씨가 추워 계속 씻지 못하고 있다가 일주일 만에 얼음물을 깨고 발을 씻었는데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씻고 나서 먹은 산도 과자가 너무 맛있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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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2012년 이야기

    서용석합덕읍 신촌리

    “소소한 추억처럼 전통문화 잊혀질지 몰라”

    “소소한 추억처럼 전통문화 잊혀질지 몰라”

    첫 번째 사진은 군복무시절 카투사로 활동하던 당시의 사진이다. 카투사로 군 복무한 것을 하나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사진 중 하나다. 입대 당시 나는 요즘 젊은이 못지 않게 혈기왕성했다. 지금은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옛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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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군 복무 시절

    김낙찬대우광고산업 대표

    “광고와 함께한 30여 년의 세월”

    “광고와 함께한 30여 년의 세월”

    첫 번째 사진은 군 복무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성탄절을 기념해 부대원들과 다과를 즐기며 장기자랑을 했던 기억이다. 앞에서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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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2012년 이야기

    김갑배사 충남모범운전자연합회 당진시지회 사무국장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첫번째 사진은 제주도에서 군생활을 하던 당시의 사진이다. 해병 헌병대 지프차에서 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군복보다는 사복을 입고 생활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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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스물 네 살

    군에서 보낸 지난 청춘을 꺼내어보다

    군에서 보낸 지난 청춘을 꺼내어보다

    첫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앳된 얼굴. 소위로 갓 임관했을 때가 겨우 스물 네 살이었다. 강원도 철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해 충무(지금의 통영), 연천, 진해, 인제, 오산을 거쳐 전역했던 홍천에 이르기 까지 전국 팔도에 수 십 번씩 근무지를 옮겨 다녔다. 덕분에 이사에는 이골이 났다. 짐을 풀면 이내 이삿짐을 꾸려야 했으므로 그냥 쌓아 놓는 게 버릇이 됐다. 지난 추억이 담긴 사진첩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갑다. 나의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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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군입대 전

    김재각전 고대면발전협의회장

    “술취한 사진사 때문에 결혼식 사진 없어”

    “술취한 사진사 때문에 결혼식 사진 없어”

    첫 번째 사진은 군입대 전 초락도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 사진이다. 친구들과 사월 초파일에 모여 엠프를 빌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놀았다. 사진 속 장소는 지금의 대호방조제가 생기기 전의 초락도 모습이다. 그 당시는 바닷가였다. 그대로 보전됐다면 지금은 관광지가 됐을 것이다. 초락도 인근 바다에는 해산물이 풍부해 꽃게며 각종 수산물이 많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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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젊은 날

    고대 옥현리 고향집에서의 추억

    고대 옥현리 고향집에서의 추억

    첫 번째 사진은 사진관에서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시에는 사진에 문양을 넣어 인화하는게 유행이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함께 찍은 사람들이 사진에 그대로 나와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한다. 내 젊은 날의 모습 이외에 여러 사람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때는 그랬지’라며 추억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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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2012년 이야기

    이광휘당진시재향군인회 신평면 회장

    “부모사랑은 말이나 글로 표현 안돼”

    “부모사랑은 말이나 글로 표현 안돼”

    두 번째 사진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2군단 헌병대에서 군 생활을 하던 때 찍은 사진이다.

    이 때야 말로 가장 혈기 왕성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2군단장이었던 전 김종환 군단장을 모시며 경호를 하기도 하고 비서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제법 덩치며 키도 누구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모습이지만 마음 만큼은 당시의 혈기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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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20대의 모습

    신혁균합덕읍 영풍영농회사 대표

    “변하지 않은 건 마음뿐”

    “변하지 않은 건 마음뿐”

    두번째 사진은 내가 군대 복무 중이던 때의 사진이다. 혈기 왕성했던 20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사진을 보니 ‘지금도 마음만은 그 때와 같은 걸’이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나는 당시 제1공수특전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내가 공수특전단을 전역한 이후 특수전사령부가 창설되고 각 여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렵기도 어려웠던 군복무 였지만 뒤 돌아보면 지금의 단단한 나를 있게해 준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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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2012년 이야기

    김갑배사 충남모범운전자연합회 당진시지회 사무국장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두번째 사진은 당시 군차량으로 나왔던 포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차량이지만 당시만해도 고급차량으로 손꼽히는 모델이었다.

    당시에는 멋있는 모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촌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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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임관 1년 후 쯤

    군에서 보낸 지난 청춘을 꺼내어보다

    군에서 보낸 지난 청춘을 꺼내어보다

    두 번째 사진은 임관 1년 후 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사라진 한미연합 ‘팀 스피릿(Team Spirit) 훈련’ 당시의 모습이다. 두 명의 미군, 그리고 하사와 분대장이 훈련을 준비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3개월 연습하고 2주 간 진행했던 훈련은 참 고됐다. 중대장을 따라 밤새 걷고 동이 틀 무렵이면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그렇게 경기도 여주에서 충북 제천까지 행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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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군생활 시절

    김재각전 고대면발전협의회장

    “술취한 사진사 때문에 결혼식 사진 없어”

    “술취한 사진사 때문에 결혼식 사진 없어”

    두 번째 사진은 군생활 시절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는 최전방,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근무했다. 군생활은 고됐다. 북한군인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세숫비누도 사용하지 못하고 담배도 못 피우게 했었다. 우측 첫 번째 동료는 나와 동갑내기인 처당숙(양홍석)이다. 그는 나와 같은 날 입대해 함께 제대했다. 69년도는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기에 제대하지 않고 장교에 지원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날 취직시켜주겠다며 지원하지 못하게 붙잡고 야단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지금의 아내를 소개시켜줘 결혼까지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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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2012년 이야기

    신혁균합덕읍 영풍영농회사 대표

    “변하지 않은 건 마음뿐”

    “변하지 않은 건 마음뿐”

    세번째 사진 제1공수특전단에서 강하 훈련을 하기 전 찍은 사진이다.(사진 중앙) 수송선을 타고 창공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배포가 당시에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군복에 공수마크 하나를 달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당시 공수훈련을 받고 공수50기로 하늘을 날았다. 귀신 같은 조교와의 훈련은 역경이었지만 낙하산이 펴지고 발 밑에 펼쳐진 전경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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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2012년 이야기

    김갑배사 충남모범운전자연합회 당진시지회 사무국장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제주도"

    세번째 사진은 제주도의 명산이자 나라의 명산인 한라산 중턱에서 찍은 사진이다. 눈이 하얗게 쌓인 한라산의 경관은 절경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당시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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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2012년 이야기

    최장룡신평면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

    “선글라스에 장발로 멋 부린 시절”

    “선글라스에 장발로 멋 부린 시절”

    세 번째 사진은 79년도 군 복무 중 경계초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우연하게도 당진시의회 의회사무국 류병두 국장을 자대에서 만나 함께 군 생활을 보냈다. 당시 자대에 배치돼 막내로 생활하고 있을 당시 류병두 국장은 상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줘 조금이나마 편안히 군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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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2012년 이야기

    최재환신평면 초대2리 이장

    "품앗이하며 이웃 간 정 쌓던 시절"

    "품앗이하며 이웃 간 정 쌓던 시절"

    세 번째 사진은 멧돌포에서 방위로 근무하던 당시 후임병들과 함께 장난을 치며 찍은 사진이다.(사진 중앙) 해안 3대대 신평 해안초소에서 근무했던 나는 군생활과 농사일을 병행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두 일을 병행하느라 어렵기도 했지만 농사일에 바쁜 가족들을 돕기 위해서는 이른 새벽이고 밤이고 일손을 거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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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2012년 이야기

    장용희대호지 적서리

    “명절 땐 열흘 밤낮 머리 깍아”

    “명절 땐 열흘 밤낮 머리 깍아”

    네 번째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전우회 모임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내 생일을 맞아 전우들을 초청해 설악가든에서 모임을 가졌다. 참전 전우회 모임은 전역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꾸준히 모임을 가질 정도로 결속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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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군대 복무 중

    최장룡신평면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

    “선글라스에 장발로 멋 부린 시절”

    “선글라스에 장발로 멋 부린 시절”

    네 번째 사진은 군대 복무 중이던 친구의 면회 때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정권영(매산리)과 나, 박창용(매산리)이다. 이때 쯤부터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듯하다. 내가 직접 사진을 보면서도 불과 몇 년 사이에 모습이 많이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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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2012년 이야기

    김병수고대농협조합장

    “우리 아내가 제일 예뻐”

    “우리 아내가 제일 예뻐”

    네 번째 사진은 큰아들(김영훈)이 군대에 복역하던 시절 면회 가서 찍은 사진이다. 현재 큰아들은 명지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한 대도 때려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나의 교육방침이었고 대화와 설득으로 아이들을 키워왔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나에게 거짓말을 안 하게 되었고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정리 서보람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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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2013년 이야기

    염윤상당진시임업후계자영농종합법인 대표

    “빠른 세월에 야속함 느껴”

    “빠른 세월에 야속함 느껴”

    첫 번째  사진은 9사단 백마부대에서 군복무 당시 찍은 사진이다. 포병으로 근무하고 있던 나는 31개월 보름 동안의 군생활을 마치고 더 성숙해진 모습의 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비록 어렵고 힘든 군생활이었지만 뒤돌아 보면 재미있고 값진 시간이 이었다.

    군생활에 적응하고 고참이 되어가면서 생활이 편해졌지만 초창기 이등병 때는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의 군대는 엄격했기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간부들로부터 신참들에 대한 군기교육이 명령으로 하달됐고 고참들은 명령에 따라 신참들의 군기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군대야 복무기간도 매우 짧아지고 구타도 사라져 많이 편안한 곳이 되었다. 비록 군복무를 하고 있는 당사자는 어려운 생활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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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군 복무 당시

    “지역발전 위해 땀 흘린 옛 추억”

    “지역발전 위해 땀 흘린 옛 추억”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은 군 복무 당시에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 모두 왼쪽 끝에서 있는게 나다. 통신병과에 보직을 받아 통신병으로 근무하며 군 내부의 통신업무를 담당하는게 내 일이었다. 힘들고 고된 군 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를 붙여 즐겁게 생활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일수록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어떤 일이든 헤쳐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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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2013년 이야기

    염윤상당진시임업후계자영농종합법인 대표

    “빠른 세월에 야속함 느껴”

    “빠른 세월에 야속함 느껴”

    두 번째 사진은  포병으로 복무하던 당시 105mm포 훈련에 대비해 연습하는 과정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진에는 백마부대에서 함께 복무한 몇몇 동기들이 거주 중이다. 거산리에서 유성광고사를 운영하는 최익남 씨와 비록 같은 대대에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신평 남산리에 거주 중인 이도랑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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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2013년 이야기

    “추억과 긍지의 흔적”

    “추억과 긍지의 흔적”

    두 번째 사진은 군 복무 시절 찍은 것이다. 나는 공수 특전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남 K-16 비행장에서 낙하훈련 직전에 찍었다. 한번 할 군 생활이라면 멋있게 하고 싶어 특전사에 지원했던 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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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2013년 이야기

    “새로운 운명 찾아 나서”

    “새로운 운명 찾아 나서”

    세 번째 사진은 강원도 인재의 2사단 17연대에서 복무하며 찍은 사진이다.

    당시분대장으로 활동했던 나(사진 가운데)는 동계훈련에서 분대원들과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남은 사진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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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2013년 이야기

    신태운고대면 개발위원회 위원장

    "찬란했던 젊은 날의 초상"

    "찬란했던 젊은 날의 초상"

    세 번째 사진은 백골부대 탐색대에서 근무했을 때다. 군생활을 마친 나는 고향에서 농사일에 전념하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평택군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으로 진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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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군복무 시절

    윤세중윤이벤트 대표

    “연예인과 함께 했던 젊은 시절”

    “연예인과 함께 했던 젊은 시절”

    첫 번째 사진은 군복무 시절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나는 경기도 교문리에서 군생활을 했다. 근무지가 고향인 당진과 거리가 먼 편은 아니어서 왠지 모를 위안이 되곤 했다. 나는 연대 노래자랑, 사단 노래자랑 등 나가기만 하면 1등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끼가 많아 군생활을 하면서 선임들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다. 친구들의 결혼식 사회는 내가 도맡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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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군복무시절

    이태용동일교회 안수집사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까"

    세 번째 사진은 군복무시절 찍은 사진이다. 이때 나는 탄약보급소에서 근무했다. 주로 활동보다는 문서처리를 하는 행정병이었다. 행정병 군생활이 더 쉬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군기가 더 엄격하다. 야외 활동을 하면 모든 부대원들이 지쳐서 곯아떨어지는 것이 부지기수다. 행정병들은 주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다보니 퇴근 후 내무반에서 선임과 돈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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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2015년 이야기

    서정길송악읍 가교1리

    "군대에서 들은 득남 소식"

    "군대에서 들은 득남 소식"

    첫 번째 사진은 나와 내 아내 홍종길 여사, 큰 아들 천석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내가 강원도 금화군에서 군 생활했을 당시 모습이다. 내 아내는 나와 같은 송악읍 가교리 출신이다. 아내는 가교리에서도 착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우리는 21살에 결혼했다. 결혼한지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입대하게 됐다.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하다가 아내만 두고 떠나야 해서 미안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 편지로 큰 아들 천석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히 감격했고 아내에게 고마웠다. 시간이 지나고 편지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말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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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26살 때

    홍종원신평요양센터 대표

    “온 가족이 노인 사랑”

    “온 가족이 노인 사랑”

    첫 번째 사진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9사단에서 중위로 있을 때 중대 체육대회에서 4개 소대 중 우승을 차지해 소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26살 때 육군 ROTC를 지원해 2년 4개월 동안 근무했다. 빛바랜 사진을 보니 세월이 많이 지난 것이 실감된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소대원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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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23살 병장 때

    양재노고대노인대학 총학생회장

    ‘총기사건’ 아찔한 군 생활의 추억

    ‘총기사건’ 아찔한 군 생활의 추억

    첫 번째 사진은 23살 병장 때 찍은 사진이다. 추억을 남기고 싶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강원도 5군단 내 군인극장에서 군 생활을 했다. 운이 좋아 3여 년 동안 극장에서 티켓을 판매했다. 난 키가 작은 탓에 입대할 수 없어 세 번의 신체검사를 거친 후 간신히 입대했다. 당시 키 때문에 입대를 할 수 없다는 통보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입대 후에는 군 생활이 너무도 재밌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가 여러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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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2015년 이야기

    양재노고대노인대학 총학생회장

    ‘총기사건’ 아찔한 군 생활의 추억

    ‘총기사건’ 아찔한 군 생활의 추억

    두 번째 사진은 함께 군인극장에서 일했던 동기인 김창연과 찍은 사진이다. 당시 극장에는 전기가 없어 발전기를 돌렸는데, 김창연이 발전기 기사로 일했다. 현재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당시 군인극장에서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군인극장은 민간인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아리따운 여성이오면 티켓 뒤에 쪽지를 써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또 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극장에서 총기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총기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벌점을 받거나 영창을 가지는 않았지만 매우 놀랐다.  군대에서의 지난 추억을 되새겨보면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아찔한 사건도 엄청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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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셋째 아들이 군복무 할 때

    최연우대호지면 장정리

    "아들들과 찍은 가족사진"

    "아들들과 찍은 가족사진"

    두 번째 사진은 셋째 아들이 군복무 할 때 면회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셋째 아들은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했다. 당시 당진에서 강원도까지 가는데는 하루나 이틀이 걸렸다. 그 당시 아이들을 군대로 보낼 때면 매번 마음이 적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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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2016년 이야기

    편영범고대면농촌지도자회장

    "한껏 멋 내던 젊은 시절"

    "한껏 멋 내던 젊은 시절"

    두 번째 사진은 파주에서 군 복무했던 시절 당시 모습이다. 나는 포병으로 34개월간 군 복무를 했다. 나는 사수였고 내 옆에 있는 김응구는 금산 출신으로 사번포수였다. 당시 군에는 사진사가 있었다. 그래서 군 안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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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2016년 이야기

    강근묵고대면 당진포 2리

    고참이 서리한 꿀맛 사과

    고참이 서리한 꿀맛 사과

    세 번째 사진은 군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치악산 밑에서 3년간 군 생활을 했다. 군에서는 참 재밌는 추억을 많이 쌓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일주일됐을 때 자고 있는 우리들을 고참이 깨웠다. 일어나면서 ‘무엇이 또 잘못 됐구나, 큰 일이 벌어지겠구나’하고 걱정했는데, 고참이 서리해 온 사과를 먹으라며 주더라.

    딱 이 시기였는데, 그 사과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때 고참이 사과를 너무 많이 서리해서 부대 천장에 숨겨놓고 몰래 꺼내먹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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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베트남전쟁 파병 당시

    장용희대호지 적서리

    ‘사과’가 맺어준 인연

    ‘사과’가 맺어준 인연

    첫 번째 사진은 베트남전쟁 파병 당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먹고살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나도 그랬다. 이 때 찍은 사진이 많다. 당시엔 힘들긴 했지만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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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25세 때

    최덕기송산면 매곡리

    “군 생활이 가장 그리워”

    “군 생활이 가장 그리워”

    첫 번째 사진은 군인시절 찍은 사진이다. 아직도 사진 속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 25세 때 입대했는데, 사진 속 모자를 쓰고 있는 친구는 송산초등학교 선배인 최용식으로 현재 인천에 산다. 또 다른 사진 속 친구는 송산초등학교 동창인 서성일이다. 성일이는 현재 시흥에서 살고 있다. 이 사진은 올해 여름 경 우연히 발견해 두 친구에게 보냈더니 깜짝 놀라더라. 난 이때가 가장 그립다. 군 생활을 대구와 포항에서 했는데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요즘 청년들은 군에 입대하는 꿈이 악몽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군 입대는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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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2017년 이야기

    백종국정미면 대조리 새마을지도자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세 번째 사진은 군대에서 태권도 시범을 선보일 때 찍은 사진이다.

    기와공장에서 일할 때부터 태권도는 배웠다. 당시엔 군대에서도 태권도를 가르쳤다. 군 입대해서 3년 간 태권도를 배웠는데, 이정도 배우면 유단자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 사진 찍은 날은 국군의 날 행사 때다. 40여 년 전이라 태권도를 많이 까먹었지만, 위험한 순간에 내 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은 아직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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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2017년 이야기

    조주익대호지면 장정리 새마을지도자

    장발에 나팔바지 “멋 좀 부렸지~”

    장발에 나팔바지 “멋 좀 부렸지~”

    세 번째 사진은 친한 후배 이무하와 삽교천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후배는 인천에 살고 있다. 후배에게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을 소개시켜줬다. 당시 나는 아담하고 머리도 길었던 터라, 다들 나를 여자로 봤다. 친형과 서울에서 수퍼를 운영할 적에는 동네에서 “젊은 부부가 수퍼를 운영하는데 떼돈을 벌었다더라”하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재밌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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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2017년 이야기

    백종국정미면 대조리 새마을지도자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네 번째 사진은 우리 부대 간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제3587부대 제3중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나는 집이나 다리를 짓는 공병이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전우들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어보기도 하고, 서로 연애편지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우들이 자신의 고향에 있는 여자 친구들을 서로 소개해주며 편지를 주고받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즐거운 기억이 있는 한편, 군 생활 중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도로를 내려고 폭발작업을 하는데, 제대를 앞둔 선임이 현장에서 사망한 것이다. 당시엔 안전장비가 없어 이러한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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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2017년 이야기

    백종국정미면 대조리 새마을지도자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연애편지 몰래 읽던 군 시절"

    다섯 번째 사진은 5분 대기조 전우들과 찍은 사진이다.

    5분 대기조는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 5분 만에 출동해야 하는 대기조이다. 실탄을 장전하고 군화를 신은 상태로 잠을 자기도 했다. 제일 오른쪽 끝에 있는 군인이 바로 나다.

    >>백종국 정미면 대조리 새마을지도자는

    ·1950년 정미면 대조리 출생

    ·현 정미면 대조리 새마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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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2019년 이야기

    베트남 전쟁에서 사우디 근무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사우디 근무까지

    이 사진들은 현 월남참전자회 당진시지회인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의 주년 행사 및 강연회 때 촬영한 사진이다. 옆에 있는 사람은 이철환 전 당진시장과 윤수일 전 당진시의회 의장이다. 그때 유공회원들과 함께 전국에서 열리는 국가안보결의대회에 참석하곤 했다. 재임 당시 베트남으로 전적지 순례를 다녀온 적도 있다. 베트남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전쟁 당시 베트남 땅굴에 살던 한 간호장교를 붙잡았다. 얼굴이 새하얗고 몸이 매우 왜소했다. 그를 헤치라며 칼을 손에 쥐어줬는데 나는 명령대로 하지 못했다. 내 뒷사람도 그 뒷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참혹한 전쟁은 베트남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슬픈 과거다. 한편 순례 당시 한 베트남 사람이 어눌하게 한국말을 하며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한국군이었던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는 모습에 고맙고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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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2019년 이야기

    3개월 동안 GP서 먹고 자며 복무

    3개월 동안 GP서 먹고 자며 복무

    나는 전역을 바로 앞두고 경기도 연천의 신망리에 위치한 177GP에서 3개월 간 복무했다. 몽산 정도 높이의 이곳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3개월을 이곳에서 자고 먹고 복무해야 한다. 감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철책 안으로 들어가 비무장지대에서 야간 감시 활동도 한다. 이 사진 뒤에 있는 곳이 내가 생활했던 곳이다. 근방 300m 안에는 지하 숙소와 식당, 농구대가 전부였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식당 밥이 맛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다시 가보고 싶은 열쇠부대”」 앨범 펼치기 →

  73. 2019년 이야기

    힘들었던 3년 간의 복무 시절

    힘들었던 3년 간의 복무 시절

    첫 번째 사진은 군대 가기 전 젊었을 때 모습이다. 아마 이 사진이 중매 당시 아내에게 보냈던 사진일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후 인제군 원통리에 위치한 12사단 수색대대에 입대했다. 당시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방위로 복무했는데, 나는 현역으로 입대했다. 그래서 동네에 군 동기가 없다.

    한편 12사단 수색대대는 여느 곳보다 군기가 엄했다. 복무했던 3년은 정말 나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이 사진은 그때 같이 훈련했던 군대 동기들과 찍은 사진이며, 세 번째 사진은 공수훈련 때 모습이다.

    「백종대 성당건축설비 대표」 앨범 펼치기 →

  74. 2019년 이야기

    22살 앳된 내 모습 23세 때 내 모습이다.

    22살 앳된 내 모습 23세 때 내 모습이다.

    이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카투사로 복무했다. 당시 순성에서 27명이 같이 입대했는데 카투사는 나뿐이었다. 카투사로 복무했던 것이 좋긴 했지만, 항상 가족들의 걱정이 컸다.

    「먼저 떠난 그리운 아내」 앨범 펼치기 →

  75. 2019년 이야기

    2-1. 함께 했던 동기들

    2-1. 함께 했던 동기들

    같이 복무했던 동기들이다. 작은 GP에서는 30명과 군견병 한 마리와 함께 생활한다. 불시에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우리 모두 총과 총알을 소지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서로 간에 일이 있어도 절대 때리면 안 된다. 혹여 갈등이 있더라도 바로 사과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모두 사이가 좋았다.

    2-1 역시 군 복무할 때 함께 복무했던 동기들이 만들어 준 앨범이다. 이 안에 내사진과 동기들이 직접 쓴 편지 등이 있다.

    「“다시 가보고 싶은 열쇠부대”」 앨범 펼치기 →

  76. 2019년 이야기

    “선생님이 제 선생님이어서 행복했어요”

    “선생님이 제 선생님이어서 행복했어요”

    1983년 여름, 공주교대에 입학한 뒤 병영훈련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에 교대생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RNTC(부사관 학군단)로 3주 동안 병영훈련을 받았다. 조치원에서 병영훈련을 하면서 11명의 분대원들 및 교관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다. 한창 훈련 중이던 어느 날, 사흘 동안 전기가 끊기고 물도 나오지 않았다. 무더위 속에 훈련을 받았지만 씻을 수가 없어 무척 고생했다. 그 상태로 이틀이 지나자 소방차가 와서 물을 뿌려줬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제 선생님이어서 행복했어요”」 앨범 펼치기 →

  77. 군 복무할 당시

    편종만당진외국인교회 담임목사

    헌병 자부심 갖던 시절

    헌병 자부심 갖던 시절

    나는 헌병이었다. 헌병은 포로를 교환할 때 헌병 1명당 포로 7명에 준한하는 몸값이었다. 그래서 현역으로 있을 때 자부심이 있었다. 한 번은 춘천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와 이야기하다 내가 헌병이라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러곤 차비를 내지 않아도 좋으니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군 복무할 당시 헌병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싶었다.

    「아내와 함께한 꿈만 같았던 43년」 앨범 펼치기 →

  78. 2019년 이야기

    소대장과 함께

    소대장과 함께

    철책 앞에서 당시 소대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며 저 뒤가 우리가 생활하고 복무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부식을 받을 때도 경계 근무를 서야 한다. 언제 어떻게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경계가 삼엄한 곳이다. 전역 열흘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고 소식도 이틀 후에야 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 뒤에야 당진으로 출발해 대방리에서 청량리역을 도착해, 용산에서 버스를 타고 합덕에 와 면천 집까지 왔다.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장례를 다 치르고 다시 군대로 돌아가 3일 후에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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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장교 시절

    원종돈용인대학교 당진시동문회장

    장교시절 전차 앞에서

    장교시절 전차 앞에서

    나는 학사장교로 3년3개월 간 복무했다. 180명의 대학 동기 중 150명이 시기에 맞춰 입대한다. 하지만 나는 학사장교의 꿈을 갖고 4학년까지 마친 뒤 시험을 보고 입대했다. 당시에는 학력고사 점수에 대학 내신과 면접, 체력시험 등 모든 점수를 더해야만 학사장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고, 합격하지 못할까봐 걱정도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합격해 전차부대로 배치받아 군 생활을 했다. 특이하게 소대장 생활을 짧게 했는데, 대신 2년 간 지휘통제실에서 상황장교로 근무했다. 내 직급에는 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상급자의 신뢰로 복무할 수 있었다. 군대에 중요한 일을 했던 것이 지금까지 뿌듯함으로 남아 있다.

    「특별했던 나의 군 생활」 앨범 펼치기 →

  80. 점심시간

    편종만당진외국인교회 담임목사

    누가 몸짱?

    누가 몸짱?

    점심시간에 헌병참모부 사무실 앞에서 전우들과 상의를 벗은 뒤 한껏 무게를 잡고 근육을 과시하던 모습이다. 나는 복무할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 신우회장을 맡았었다. 신우회는 사병 중 신앙인들의 모임이다. 그래서인지 내 방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신망도 꽤 두터워 나와 함께 외출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진을 보니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내와 함께한 꿈만 같았던 43년」 앨범 펼치기 →

  81. 2019년 이야기

    4-1. 대남방송에 시끄럽기도

    4-1. 대남방송에 시끄럽기도

    대북방송을 하던 대형 스피커 앞에서 찍은 모습이다. 처음에 갔을 땐 대북방송에, 대남방송까지 듣다 보면 시끄러워서 못살 정도였다. 북한에서 송출하는 대남방송을 듣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4-1 사진은 식당 옥상에서 진행된 공연 때 모습이다. 당시 4인조 밴드가 왔었다. 일부러 북한에게 보여주려고 옥상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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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2019년 이야기

    탁구만 해도 즐거워

    탁구만 해도 즐거워

    마지막 사진은 탁구 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GP에는 농구대와 탁구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재밌게 생활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이곳을 가고 싶다. 또 그때 함께 복무했던 동기들과도 만나고 싶다.

    김영성 면천면 성산2리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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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2020년 이야기

    김종일삼꽃색소폰선교단장

    “남산에서 고고댄스 추던 시절”

    “남산에서 고고댄스 추던 시절”

    이 사진은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에서 복무하던 시절 하사관이었던 나와 소대장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내가 복무한 인제군 원통면은 오지 중에 오지였다. 5월에도 눈이 올 정도였으며, 서울에서 오는 길이 모두 비포장도로로 가족들이 면회 올 때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산 위에서 복무할 때 발아래 구름이 깔려 있고, 가을이면 산 아래부터 단풍이 물드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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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군복무할 때

    박성두 송산면 명산리

    미군부대에서 군복무

    미군부대에서 군복무

    대천에 있었던 미군부대에서 군복무할 때 이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 생활만큼은 전방에서 보내고 싶어 자원입대를 신청했지만 아쉽게 후방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이런 내 생각을 아들(박선우)도 이어받았는지 18살의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해 군 생활을 했다.

    「뽀얗게 먼지 앉은 앨범 속 그리운 얼굴들」 앨범 펼치기 →

  85. 25~26세 때

    아내 사랑 산(山) 사랑

    아내 사랑 산(山) 사랑

    첫 번째 사진 은 경기도 포천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1977년 1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군 생활을 했다. 이 사진은 25~26세 때 전우들과 찍은 사진이다. 이들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다.

    군 생활 중 유격훈련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격훈련을 끝내면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앞장서서 유격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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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군대에서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세 번째 사진은 군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강원도 춘천에서 군 복무를 했다. 사진 속 동기(오른쪽)는 경북영동 출신이다. 연락이 두절된지 오래다. 군 전역을 일주일 남기고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사건이 발생해, 군 생활을 보름이나 더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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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22살 무렵

    한대우·최기자 부부 (면천면 죽동2리)

    한대우·최기자 부부 (면천면 죽동2리)

    첫 번째 사진은 22살 무렵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활동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그 시절 군대에는 사진사가 순회하며 군인들을 위해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나도 사진사가 내무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줬다. 이 사진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사진인데 최근 며느리가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해 선물해줬다.

    「한대우·최기자 부부 (면천면 죽동2리)」 앨범 펼치기 →

© 당진시대 · 사진과 이야기는 주민이 들려준 것입니다. 장면의 테마와 연도는 기사 글을 읽어 자동으로 분류했습니다.